Armada

<아르마다>와의 조우
내가 가진 <아르마다>는 한 권으로 되어 있는 1판 1쇄다. 난 지문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책을 다루는 것으로 악명 높았는데 유독 <아르마다>만큼은 허리가 부러지려는 위기에 놓여 있다. 물론 이런 책의 환난은 내 탓이 아니다. 영국 해협에서의 전투를 넘기지 못하고 매번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막내 누님 덕분이다. 벌써 몇년째 끝을 보지 못하고 매번 처음으로 되돌아가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하다.

가끔은 이런 누이를 보면서 <아르마다>에 대한 내 감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잠길 때도 있다. 역사를 다룬 책가운데 <아르마다>만큼 문학성과 재미를 두루 갖춘 책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그런 고민에 잠길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처음 <아르마다>를 읽었던 순간의 벅찬 감동뿐이다.

<아르마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7살 때의 일로 기억된다. 대략 이 즈음의 토요일로 기억되는데 중앙일보 북 섹션에 소개된 <아르마다>와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에 대한 리뷰를 읽고는 학교가 파한 후 바로 서점에 주문을 넣었던 것 같다.(내가 자란 곳은 궁벽한 시골이라 읽을 만한 책은 주문을 통해 손에 쥐곤 했다.) 3일 후 두 권의 책을 들고 귀가하던 길의 묘한 흥분감은 지금도 손에 닿을 듯 가깝다. 길고 긴 야자 시간 동안 당장 책을 펴고 싶은 욕망과 늦은밤 스탠드의 은은한 불빛 아래 혼자만의 의식을 치루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진자처럼 왕복하던 내 마음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날 밤. 정확하게는 다음날 동틀 무렵의 난 2년만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95년에서 9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러브레터를 보면서 아릿한 마음에 떨어졌던 몇방울의 눈물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릿한 가슴 저림때문이 아니라 숭고함과 거대한 힘에 압도되어 떨어지는 눈물이었다. 그날 이후 <아르마다>는 나의 성전이 되었다. 선잠에 빠져들면서 내 스물을 울릴 책을 지금 만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처음으로 지각을 했다.

<아르마다>에 이르는 길
오늘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운명은 날 <아르마다>와 만나게 하기 위해 제법 많은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이자벨 아자니를 좋아하던 나는 <여왕 마고>에 흠뻑 취해 버렸고, 앙리와 마고를 이해하기 위해 영화의 원작으로 알려진 뒤마의 <마고 여왕>을 탐독했다. 오래지 않아 츠바이크를 알게 되었고 메리 스튜어트의 전기를 읽게 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개봉과 함께 제세기를 읽었으며 제세기에 얽힌 실존 인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지막 발루아와 마주하게 되었다. 알랑송과 메리 스튜어트는 나를 엘리자베스와 제임스에게 이끌었으며 오래지 않아 케이트 블란셋 주연의 <엘리자베스>가 개봉되었다.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을 통해 레판토 해전을 감상했고 시오노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이야기를 통해 아르마다가 탄생을 목도했다. Sacco di Roma와 종교 개혁을 알게 되었고 아라곤과 카스티야, 합스부르크가 만들어낸 제국의 계승자 칼 5세를 만났다. 그 과정에서 부르고뉴의 샤를이 만들려던 로타랭지아 제국을 지나쳤으며 푸거와 메디치와 조우했다. 베스푸치와 피사로의 모험을 읽게 되고 마젤란의 위대한 항해에 동참했으며 드레이크의 모험도 목격했다. 그리고 7년 전 <아르마다>를 만나면서 항해의 최종 기착지는 1588년 영국 해협이 되었다.

사실 나에게 개럿 메팅리의 <아르마다>는 방대한 다큐멘터리의 메인 스크립트였다. 메팅리의 나래이션을 따라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배열되었고 풍부한 상상력과 성실함을 자랑하는 그의 서술은 재치있게 기억들의 빈틈을 매웠다. <아르마다>는 한권의 책이 불과하지만 책장을 여는 순간 내가 만난 것은 인간의 지각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신의 바람-7년만의 깨달음
누님방에 들어갔다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아르마다>를 다시 읽게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 챕터만 다시 읽었다. <<시간이 주는 유용함을 누려라>>는 제목의 엘리자베스를 다룬 챕터의 후반부와 네덜란드에서의 반란을 진압하던 파르마 공작을 다룬 챕터의 전반부, 앙리 3세가 기즈 공작을 암살하는 챕터, 그리고 신의 바람으로 불리는 마지막 챕터(사실 이 뒤로도 두 챕터가 더 있긴 하다). 하지만 그 15분 동안에 난 지난 7년간 놓치고 있던 행간의 끝을 잡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7년전 내가 처음 <아르마다>를 읽던 당시의 세계는 경제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정치적으로 안정된 세계였다. 냉전은 종식되었고 신교와 구교가 바라보았던 <신의 바람>을 이해하기 위해 난 44년 노르망디를 상상해야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신을 향한 믿음을 위해 그토록 잔인한 양쪽 모두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교의 모든 배신자들을 재판소에 넘기려는 스페인의 어두운 정열로 이해하지 못했고, 구교를 약탈하고 전복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위그노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신과 인간의 경건함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종교적 광기와 정치적 신념 그리고 식민지 문제로 불거진 경제 갈등이 복잡하게 얽힌 시대의 폭풍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났다.

그런데 7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400년전 신교와 구교의 싸움만큼이나 오늘의 세계도 복잡하고 어렵단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신의 바람>을 상상하기 위해 몇십년이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다. 바로 지난주에 사람들은 4세기 전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숨죽이며 전투를 지켜보았던 심정으로 텔레비젼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종교적 광기와 정치적 신념, 그리고 경제적 이해 관계는 4세기 전이나 오늘날에나 여전히 사람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맹목적이며 적에게 가혹하다.

서기 2004년 <신의 바람>은 어디로 부는가?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두 집단의 광기가 정면 충돌한 미대선을 전세계인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일방은 부시의 당선에 안도감을 내비치고 일방은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한다. 하지만 <신의 바람>은 여전히 여전히 향배를 알기 어렵다. 부시의 재선은 누구의 승리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다. 단지 현재 상황을 연장시키는 것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전투에서 신은 그 누구의 정의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단지 상황을 4년 연장시켰을 뿐이다. 그것도 가장 첨예하고 날카롭게 대립하는 균형을 유지한채로 말이다. 이긴 일방은 오늘의 승리가 불안한 승리임을 잘 알며 패배한 일방은 오늘의 패배가 내일의 승리를 위한 초석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양방의 눈치를 보고 있는 또 다른 일방은 신이 아직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내비친다.

400년 전 신은 아르마다의 패배를 통해 누구의 정의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신은 지금껏 한번도 바람을 통해 누가 정의인지 지적해 준 적이 없다. 단지 냉혹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저마다 신이 자신의 정의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것으로 믿고 피흘려왔을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긴장 상태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알고 있다. 왜냐면 <신의 바람>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믿음이지 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신의 바람>이 자신의 정의를 수호할 것이라 믿으며 상대에게 적의를 불태우며 잔혹한 복수를 꿈꾼다. 역사로부터 인간이 배우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는 실례일 뿐 그 아무것도 아닌 채.

[#M_ 개인적인 P.S. | less|

<신>과 <신의 바람>은 인용구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인용구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겠죠. 이런 이유로 <신>과 <신의 바람>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할 문제를 제기 하시려면 <아르마다>를 먼저 읽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실 <아르마다>에서는 <신>과 <신의 바람>을 명시적으로 정의내리지 않습니다. 단지 가이드라인을 잡아줄 따름입니다. 저는 역사나 사회의 거시적 흐름 정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쿤에 따르면 그것은 지배적 패러다임이 될지도 모르겠지요. 또 사람에 따라서는 어디엔가 존재하는 진짜 신의 섭리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아르마다>에서 가장 감동적인 인물은 지금껏 한번도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불운한 제독인 Medina Sidonia입니다. 언젠가 스페인에 가면 그의 초상과 기록을 꼭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요. 역사가 기억하는 영웅은 아니지만 성실한 리더이자 군인인 그의 행동은 <아르마다>에 재미를 뛰어넘는 숭고함을 선사하죠. 사실 <아르마다>는 소설이 아닙니다. 에세이에 가까운 역사서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분류겠죠. 하지만 소설보다 더 재밌는 역사책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읽은 지인들의 한결 같은 평가입니다.

끝으로 막내 누님의 항해가 드디어 영국 해협으로 들어섰습니다 하워드와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 함대가 아르마다와 막 조우하려는 참 입니다. 파리는 카톨릭 동맹의 지배아래 있고 나바르는 승리를 활용하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역사의 그림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 시대 프랑스에 대해 언급하자면 앙리 3세와 앙리 드 나바르(훗날 앙리4세)는 종형제라는 혈연 관계가 아니라 종교보다 왕권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적이 되었고 친구가 되었으며 위대한 유산의 상속자가 되었던 셈이죠.

제가 언제가 쓰고 싶다고 언급했던 기즈와 로렌가는 신하였기에 왕권이 지니는 초월성을 평생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왕자와 범인을 구분하는 넘어설 수 없는 경계라고 해야할까요? 아무튼 이 책에 등장하는 왕자들은 어느 누구도 <신의 바람>을 믿지 않습니다. 단지 믿는 척 할 뿐이죠. 대신에 <신의 바람>을 만들어 내고 이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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