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밤

바람이 스산하다. 소슬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들고 어느새 사위가 어둑하다. 길을 걷다 떨어지는 낙엽과 마주친다. 어린 시절에는 그 가을의 첫번째 낙엽을 얻기 위해 고심했었는데 오늘의 낙엽은 떨어지는 잎사귀에 지나지 않는다. 가을이 되어 가장 아름답게 물들을 것 같은 잎사귀를 눈짐작으로 찍어 놓고 여름부터 가을을 기다리던 소년은 이제 없다.

5시 30분 빛이 사라진 거리를 걷기 전까지 내 마음 속에는 소년이 살아 있었다. 냉정하지 못한, 어쩌면 순수할 지도 모를 소년은 소녀를 찾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내 난 몇달 전 처음으로 액자를 샀다는 말이 거짓임을 깨달았다. 16살 되던 해 그 소년은 바람이 그의 손에 쥐어준 낙엽 하나를 액자에 담아 소녀에게 보냈다. 소녀는 아주 가끔 이상한 통로를 통해 그녀의 존재를 소년에게 주지시킨다. 기묘한 통로에서 소녀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소년의 가슴은 무거워 진다. 소년에게 소녀는 영원히 깨어나질 못할 꿈이다.

소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몇년 동안 자신을 속인 채 살았다. 세상 모든 여자들의 얼굴에서 소녀의 흔적을 찾아내는 그 자신을 얼마나 저주했는지 소녀는 모른다. 소년은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몽롱하게 말하고 몽롱하게 행동했다. 명료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소년은 소녀를 잊을 수 없지만 몽롱한 소년이라면 몽롬함을 핑계삼아 소녀를 잊어도 되는 것 아니냐고 소년은 나에게 물어왔다. 난 소년에게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청년이 된 소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척 의뭉스럽게 말하고 웃었다. 하지만 운명은 아직도 소녀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청년은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글을 쓰고, 진지한 눈초리로 문제를 푼다. 하지만 이내 청년은 자기 안의 소년이 다시 살아 났음을 깨닫는다. 청년의 삶에서 의욕이 사라져 버린다. 청년은 외로워 한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오늘 난 소녀의 흔적을 찾고 싶어하는 한때는 소년이었을 청년을 만났다. 그가 살고 있는 삶의 외형은 지극히 정상이었지만 생기가 사라진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글을 쓰고, 진지한 눈초리로 문제를 푸는 동안 청년은 소년이 되었고, 소년은 소녀를 생각했다. 소년은 닿을 듯 닿지 않는 소녀의 존재에 또 다시 괴로워 하고 있었다.

결국 난 청년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에 끝맺음을 지을 때가 왔다고. 운명이 정한 끝이 여기가 아니라면 언젠가 청년과 소녀가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소년의 꿈이 아닌 청년의 꿈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소년의 꿈을 이어 꾸는 청년은 결코 그 스스로의 꿈을 꿀 수 없는 법이라고 말해주었다.

청년은 슬픈 마음으로 소년을 가슴에 묻었다. 소년이 묻히며 소녀도 같이 묻혔다. 어느날 청년이 소녀를 만난다면 소녀는 더 이상 소년의 소녀가 아니라 청년의 그녀일 것이다. 그렇게 11월의 어느날 오후는 저물었다.

이제 청년은 편한 마음으로 잠들려 한다. 내일은 다시 활력 넘치고 의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청년은 자리에 누워 있다. 그 곁에서 난 비내리는 창밖을 바라본다. 소년과 청년을 모두 아는 나는 이들의 운명에 술 한잔이 마시고 싶어진다. 땅과 강렬한 입맞춤을 나누는 빗소리는 더할나위 없이 청량하지만 나의 마음 속은 착찹하고 쓸쓸해져 술 한잔의 목넘김을 상상한다. 사랑을 모르는 나는 이래서<<<사랑해서 괴롭고 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구나>> 하고 읊조린다.

2 thoughts on “비내리는 밤”

  1. 새로운 세계를 열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달걀껍질을 깨야한다는 진리를 아름답네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훌륭해요.

  2. 잠시동안 클레이오나 멜포메네, 칼리오페를 생각했습니다. 뮤즈라는 단어를 볼 때면 항상 9명의 여신들 가운데 누구를 상상하며 썼을까 궁금해져요. 그리고 왜 학예의 아홉 여신 가운데 조각과 미술은 없는지도 궁금하구요.

    데미안을 꽤나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아프락사스의 의미는 잘 모르겠어요. 헤세는 프래그머티즘이 보통 사람들의 사유에 영향을 미치는 세상은 보지 못했잖아요. 알을 깨고 나온 아프락사스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고 두렵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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