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마린 그리고 하늘

정오가 되어 햇볕을 쐬러 나갔다. 음침한 복도를 지나 현관에 다다랐을 무렵 햇살이 아스팔트에 부셔져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햇살과 하늘에 대한 기대감으로 달아올랐던 마음은 이내 환희로 채워진다. 가끔은 작은 것에 기뻐하는 내 자신이 낯설다. 어딘지 신중하고 손익에 민감한 나답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현관 모퉁이를 돌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을 때, 난 태어나 처음으로 울트라마린 빛 하늘을 목격했다. 도록에서나 보았던 값비싼 울트라마린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은 정말이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멋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하늘에 신성성을 부여했던 고대인들의 동경이 잠시 내 마음에도 깃들었다. 신성과 장엄함, 그리고 화려함까지 단지 색채만으로도 이런 느낌이 나는구나.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내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캔버스 담는다면 얼마나 많은 울트라마린이 필요할지 생각하게 된다. 현대의 울트라마린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오래 전 책에서 읽었던 화폐 단위를 금으로 변환하고 거기에 며칠 전 보았던 1온즈당 금의 가격을 곱한다(이 순간 난 금의 가격 폭락이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는 가장 그럴 듯한 지표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원화로 바꾸고 나니 대충 즉석 복권 당첨금이라는 판단이 선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자연의 가치에, 하늘이 잠시 동안 허락한 비밀의 가치에 놀란다.

아이팟의 휠을 돌려 적당한 음악을 고르는 그 짧은 와중에 울트라마린은 사라져 버렸다. 하늘은 그 광휘를 읽고 어제 본 하늘처럼 그냥 맑고 푸르렀다. 98년에 발표된 제니퍼 페이지의 sober를 듣고 있던 난 허탈해진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어쩌면 두 번 다시 허락되지도 않을 황홀경을 고작 때 지난 노래 한 곡에 놓쳐버리다니… 인생의 얄궂음에 웃음이 나왔다. 지나가던 재수생 두 명이 벤치에 앉아 헛웃음을 터트리는 나를 보고 놀라 흠짓한다. 스물 넷 가을에 너무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또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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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울트라마린의 가격을 알고 있었다. 진짜 청금석을 이용해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었을 경우 1킬로그램당 1400만원 내외라고 한다. 최근에 사용하는 화합 물감의 경우는 물론 싸다.

캔버스 크기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으니 100호 캔버스를 그리는데 대충 물감이 얼마나 드는지 알턱이 없다. 게다가 덧칠까지 고려해야 하니까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그리고 내가 본 하늘은 광활해서 최소한 500호는 필요했다.

500호 캔버스를 울트라 마린으로 채우는데 필요한 물감의 양을 계산할 수 없어서 그냥 두리 뭉실 즉석 복권 당첨금이란 말을 썼다. 즉석 복권 당첨금이란 로또만큼 큰 액수는 아니지만 중산층의 일년 수입 정도는 된다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었다.

그리고 하늘이 어떻게 울트라마린 빛을 띄고 있을 수 있는지 절대 이해가 되지 않긴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분명 울트라마린이었다. 하지만 당시 난 배가 많이 고팠고 허기를 못이기고 헛것을 보았을 확률이 조금 높다.

마지막으로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건물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에 대입 학원이 있다. 근래에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이 늘었다. 그와 함께 내가 즐겨앉는 벤치도 빼앗겨 버렸다. 지난주에는 그 자리에서 어떤 아가씨가 문제집을 풀고 있었는데 옆에서 흘낏보니 참담했다. 솔직하게 그 문제는 이렇게 푸는 것이 아냐하고 대신 풀어주고 싶었다.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활동으로 찢어진 입술을 보면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은 수능을 기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을 시작으로 네버엔딩이라는 사실을 귀뜸해주면 어떻게 될까? 추리 소설의 범인을 남이 알려준 기분일까? 의욕 상실. 허무하고 분노가 차오르는 그런 기분이 아닐까?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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