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서점 -예찬, 그리고 배신-

친구의 과외가 끝날 때까지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서는 안되는 서점에 머물렀다.(에드몽 당테스가 메르세데스에게 했던 말처럼 스무살 지난 남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리모델링을 한 탓인지 서가의 배치는 예전과 달라져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서가를 헤집는다.

시골의 작은 서점이 지닌 장점은 주인의 눈치를 무시할 배짱만 있으면 서울의 큰 서점보다 더욱 손쉽게 책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시골 서점이란 베스트셀러나 잡지가 아닌 이상 재고를 거의 보유하지 않으며 큰 서점에서는 출판사의 경쟁에 밀려 구석으로 밀려나기 일 수인 작고 재미있는 책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니 작은 서점에는 몇가지 장점이 더 있다. 공간이 좁은 만큼 대부분의 책은 서가에 얌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화려한 디자인과 찬사로 눈을 유혹하는 현혹 효과가 통하지 않는다. 슬쩍 보는 과정에서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제목과 저자, 그리고 출판사가 전부이다. 시각적 혼란을 통해 소비자의 손에 접근하려는 얕은 마케팅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작은 서점 방대한 규모에 압도당할 염려 없이 서고를 꼼꼼하게 살펴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서가를 기욱거릴 때마다 무슨 책을 찾고 있느냐는 점원의 친절한 방해 없이도 느긋한 마음으로 책사냥을 즐길 수 있다.(개인적으로 난 한적한 시간대의 서점을 즐겨 찾는다. 186센티미터의 거구가 서가를 느릿하게 걸어다니고 있노라면 친철한 방해는 10분 단위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찾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나 역시 모른다.)

아니 작은 서점의 서가에서는 친근함이 느껴진다. 서가를 맴도는 눈동자는 오래지 않아 내 책장에도 꼽혀 있는 익숙한 제목들을 찾아 낸다. 큰 서점의 서가는 내 소유물이 아닌 것 같지만 군데 군데 친숙한 제목들이 보이는 협소한 서가는 내 소유물마냥 편안하다. 아니 실제 소유하고 있지는 않아도 읽은 책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낯선 것들을 찾아내기가 더 쉽다. 어쩌면 정신의 협소함이 통제할 수 있는 서가의 범위는 작은 서점조차 버겁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서울의 큰 서점에 들릴 기회가 적어지면서 놓치고 있던 많은 책들을 오늘 찾아낼 수 있었다. 큰 서점의 신간 안내 시스템은 거의 열흘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한달 단위로 서점에 들리게 된 난 어쩔 수 없이 놓치게 된 책들이 많았다. 하지만 친구를 기다리면서 작은 서점을 배회한 내가 얻은 수확은 꽤나 짭짤했다.

레베르테의 검술가(변역된 제목은 검의 대가였다)와 로맹가리의 유럽의 교육을 발견했고 슬론 대학원에서 나온 기념 도서도 한 권 발견했다(후반부의 필진이 정말 화려했다. 경영의 21세기에 대한 화두랄까? 아주 간만에 이필상 교수님 서평도 인상 깊었다.) 유명한 도상학자인 파노프스키와 판화의 대가인 뒤러를 다룬 책도 한권 발견했고, 사자와 권력이라는 구매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도 한권 발견했다. 팍스 이블의 도입부도 살며시 읽어주었고, 4의 규칙의 시작도 읽었다.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가 전개판으로 나왔는데 초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순간 마음이 아려왔다. 내가 가진 두권짜리 초판보다 30%는 더 두꺼워진 전개판에 추가된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비닐 포장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동안 팔아준 책이 얼마인데 하고 <책세상>의 좀스러움에 잠시 화를 냈지만 카운터에서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주인 아주머니의 시선이 걸려 조용히 내려 놓았다.

사실 지금껏 난 인터넷으로 책을 구매하는 것을 조금은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책은 상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그러면서도 리사 자딘의 그녀의 책 <상품의 역사>에서 언급한 책의 상품성에 대한 챕터를 좋아한다) 제 가격이 아닌 할인 가격에 구매하는 찝찝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난한 휴학생이 되면서(정확하게는 복무중이다) 할인 가격이면 책 한권을 더 구매할 수 있다는 깨닫게 되면서 인터넷 주문을 더 이상 수치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쌓인 정이 만만치 않지만, 늘 귀찮은 주문만 한다며 나를 구박해 책갈피 하나도 아까워 했던 아주머니에게 미안했지만 목록만 살짝 메모해서 서점을 나왔다. 그리고 이내 적립금으로 로열티를 확보한다는 마케팅 전략의 헌신적인 노예가 된 내가 한심해 졌다. 2004년 11월 14일 그 서점에 얽힌 수많은 사연을 잊어버린 것처럼 작은 서점과 내가 맺은 묵시적 계약도 오늘로서 파기 되었다. 그리고 파기된 계약서를 하늘에 던지려는 것처럼 멀리 보이는 친구에게 힘껏 팔을 흔들었다.

[#M_ 참…| less.. | 서점에 갔다가 가시나무새(내가 기억하는 한 어려서 본 가장 야한 책이었다. 물론 죽어도 다시 읽지 않을테다. 성장과 함께 부셔진 수많은 환상 가운데 이 책이 자리하는 것은 정말 싫다)의 작가 콜린 맥컬로의 신간 소설을 발견했다. 풀입관 이후 Fortune’s favorites,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시저의 여자들, 시저까지 두려 4권이나 번역이 미루어 졌는데 Morgan’s Run이 비록 조금 더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먼저 번역되다니 대략 낭패다. 아니 로마의 일인자를 전부 번역해서 출간하겠다던 출판사의 명백한 약속 위반이다. 13살 소년은 지금까지 십년 이상을 기다렸는데…_M#]

2 thoughts on “작은 서점 -예찬, 그리고 배신-”

  1. 전 큰 서점에 익숙해져서 책의 앞면을 보면 고를 수가 있는데, 작은 서점 책꽂이에서 옆면만 보이고 있으면 하나도 눈에 안들어와요.

  2. 음. 뭐랄까요? 전 옆면만 보이는 서가의 보관 방식이 한번에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 앞면이 보이는 진열 방식은 걸음도 더 많이 옮겨야 하구요. 붐비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어느 방식이던 일장 일단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서가 배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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