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Only

When I was 17
생각해 보면 17살 당시의 난 지겹도록 공부와 멀었다. 기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성적에는 무척이나 무덤덤했던 것 같다. 진짜 수능만 잘 보면 된다는 한탕주의가 심연에 자리잡고 있었고 스스로를 과신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당시의 내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공부가 아닌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였다.

지금도 그다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난 균형 감각이야 말로 삶의 통찰력이라는 말을 흘려 듣고 있었다. 하루에 책 한 권을 읽고 원고지 20장을 쓰며, 일주일에 영화 두 편을 본다는 평범한 원칙을 몸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그런 십대 후반 가장 기억 나는 영화는 <난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란 공포 영화였다. 사실 별 볼일 없는 이 영화가 기억에 남은 이유는 엔딩 크레딧을 기다리다가 심장이 멎은 것처럼 놀란 친구 녀석 때문이다.

아니 또 있다. 예쁘지는 않지만 호소력 있는 제니퍼 러브 휴잇에게 반했다고 해야 할까?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특히 가슴에 대한 노골적인 촌평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가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친구들 대부분 암묵적으로 그녀를 좋아했다. 필름이나 프리미어 같은 영화 잡지에 농담조로 실리는 가슴이 큰 배우를 캐스팅 할 때 1순위는 휴잇이라는 말장난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애니메이션 OST에서 클래식까지 헤비 메탈에서 얼터너티브 락까지 온갖 장르가 모여있던 교실 사물함에 제니퍼 러브 휴잇의 앨범은 항상 두 장쯤 있었던 같다. 그녀의 앨범을 발견하고는 ‘이런 것도 사냐’는 깔 봄에 ‘내 멋이다’라고 응수하는 장면은 꽤나 자주 목격할 수 있었던 풍경이다. 그런데 깔보는 쪽이나 응수하는 쪽이나 제니퍼의 뮤직 비디오가 흘러 나오는 순간에는 아무 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뮤직 비디오를 본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되어 응수하는 쪽에게 그녀의 앨범을 빌리기 위해 자존심을 구겨야 했던 그 표정이 선하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시절 기분이 그랬다.

When I am 24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시절 좋아했던 배우들이 늙어감을 알게 된다. 주름하나 없던 젊은 얼굴에 나이가 내려 앉고 비키니가 잘 어울리던 그 뒷모습에서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젊고 예쁜 배우를 탐색하기 보다는 같이 늙어가는 그녀들을 만나러 극장에 간다. 놀랍도록 세세한 기억은 몇 년 전 어느 영화에서는 어땠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구나 하는 짧은 감상을 내뱉는다.

사실 요즘은 이런 짧은 감상을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작품성이나 시나리오의 탁월함에 동의하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내 추억과 내 멋을 위해서 영화를 본다.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시퀸스에서 토토가 알프레도가 편집한 필름을 보며 감동 받는 것처럼 지금의 영화 보기가 그렇다. 요즘처럼 번잡하고 바쁜 세상에서 우울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를 보는 것은 고역이 된지 오래다.

If Only
2주 전 주말, 영화를 보기 위해 뭉친 동네 청년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항이 놓여 있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if only가 그것이었는데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손예진 볼 생각이 있냐? 난 솔직히 싫은데.’ 이어지는 대답들은 ‘나 역시 싫다’는 대답이었다. 내가 싫었던 이유는 손예진이 싫어서 라기 보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혀 다른 맵시와 자태는 사람의 성격을 자극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 첫사랑에 대한 모욕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래서 싫었다. 그리고 동네 청년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If only를 티켓팅했다.

사실 If Only를 보면서 느낀 생각은 영화에 대한 덧붙임이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의 죽음은 일찍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만큼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의식을 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내 과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여태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상대를 믿지 못했고 거절의 공포와 미지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거짓 용기를 꾸며 내었다.

아니 내 마음도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에게 확신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난 언제나 도망갈 퇴로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던 제일 먼저 안전하고 빠른 출입구를 확인하는 버릇처럼, 어느 술집에서나 화장실과 비상 계단을 확인하는 것처럼 난 사랑에서도 그랬다.

그러면서도 난 사랑에 빠져 있는 그 시간 동안 ‘오늘이 내 평생에 기록될 그 하루구나’ 하고 끊임 없이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 하루에 진심으로 만족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어서 하루에 만족할 생각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벼운 영화를, 어린 시절 이유없이 좋아했던 그녀를 봤음에도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은 지난 세월이 적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네 청년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녀석은 담배를 피우러 갔고 다른 한 녀석은 화장실에 갔다. 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핸드폰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동네 청년의 무리에 살짝 끼어 들었다.

4 thoughts on “If Only”

  1. If only 보고 싶었었는데 과연 볼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이 글을 읽으니까 사랑 영화가 더 보고싶어 졌어요.

  2. 음… 금요일 오후, 학교를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하나 구제하시는 셈 치시고 과감하게 납치하세요.(Paganus=P.C.I.)
    올가을은 로맨틱 영화 한편 못보고 지나가는구나 하고 저를 괴롭히는 녀석들이 꽤나 많더라구요.

    뭐 저도 오늘에서야 비포 선셋을 보러 갈 예정이긴 하지만요. 싱글도 당당하게 극장에 들어설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왠지 코멘트의 취지와 엇나가는 듯)

  3. 안녕하세요. 지나가면서 늘 보고가다가 오늘 제 블로그에 링크했습니다. 글 재미있게 잘 읽고있어요. 좋은 하루되시길.

  4. < 모종의 인물>님이셨군요. 링크를 따라 저도 flying teapot에 들리곤 했답니다. 자주 찾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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