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의 초상

사람은 누구나 혁명을 꿈꾼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혁명을 잊는다. 역사는 수많은 인물을 낳았지만 빅토르 위고 같은 예외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나이를 먹을수록 혁명을 잊어간다는 법칙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내 의식 속에 혁명이란 불온한 것 혹은 열역학 2법칙에 위배되는 가역 현상으로 이해된다. 혁명이 낳는 것은 더 큰 혼란이며 의도는 저엔트로피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실제 혁명이 낳는 것은 급격한 엔트로피의 증가뿐이다.(혁명의 층위가 쌓일수록 더 큰 물결의 엔트로피 증가가 일어난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깨달은 사실이지만 난 혁명을 정의 내리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혼란과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굳이 열역학 법칙을 변용 했다. 혁명을 정의 내리는 과정에서 흘린 피가 혁명 그 자체에서 흘린 피보다 많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귀찮음도 한 몫을 했다. 사람은 저마다 꿈꾸는 혁명의 정의가 따로 있기에 혁명에 대한 정의는(응용하면 그것은 정당성이 된다) 혁명 그 자체보다 더 큰 혼란의 원인이 될 태생적 숙명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난 혁명이라는 단어에서 새로운 세상이라는 환상보다는 붉은 피 냄새를 더 또렷하게 맡는 그런 전공을 택했고 습관보다 더 무섭다는 전공에 물들어 이제는 혁명을 감히 불온한 것이라 생각하며 피한다. 혁명이라는 단어 대신에 혁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프랑스 혁명 와중에 나타났던 진짜 반혁명은 파리를 휩쓸었던 배금주의라 생각한다.(쿠바 혁명의 반혁명은 빈곤이겠지…) 최초의 공산당 선언을 쓴 혁명가를 억만 장자로 변심 시킬 정도로 혁명의 끝은 허무한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사흘 전까지 말이다.

사흘 전 urbino님의 블로그에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대한 포스팅을 읽었다, 그리고 lunamoth님의 스크래치 페이퍼에서 앙드레 말로의 그 유명한 사진과 96년에서 97년으로 넘어가던 삶의 혁명기에 내 일기장에 적혀 있던 문구를 발견했다. 흥미로움이 불러 일으킨 호기심이 가라앉으면서 머리 속에는 혁명가의 초상이란 단어가 맴돌기 시작했다.

머리 속을 맴도는 이미지를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책꽂이를 관찰해 보니 반경 50센티 미터 안에 인간의 조건과 디스커버리 시리즈로 나온 앙드레 말로에 대한 전기, 그리고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이 보인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크세주 시리즈가 보이고 레닌의 평전도 보인다. 혁명에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면서도 표리부동한 내 책꽂이의 묘한 구성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런 놀람은 이내 어린 시절 꿈꾸었던 혁명가의 초상을 일깨웠다.

혁명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초상은 <인간의 조건>에 등장하는 기요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국제여단에서 활동하던 게르다 타로라는 여성이다. 하지만 난 이들을 인물이라 평하지 않고 초상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기요는 앙드레 말로가 상상해 낸 혁명에 대한 문학적 초상이었고 게르다 타로는 사진 한 점. 그녀에 받쳐진 짧은 헌사 외에는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당대인들의 짧은 단편에서나 겨우 그림자처럼 들어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배를 문 체 게바라의 유명한 사진보다도 게르다 타로의 사진은 한층 강렬하다. 청산가리를 놓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요는 이해하기 어려운 혁명가가 아니라 나와 같은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방금 생각난 것인데 밀란 쿤데라의 이별에 나오는 한 알의 독약은 어쩌면 이 청산가리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연성과 필연성을 겸비한 독약이라는 점에서는 더 뛰어난 장치지만) 검정 베레모를 쓴 채 내전의 한 가운데에서 잠든 게르다의 평온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무엇을 꿈꾸었는지 궁금해진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의 사이에서 그녀가 꿈꾼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역사적으로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의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범위에 한정시켜 본다면 스페인 내전의 궁금적인 승리자는 공화파다. 그런데 이런 승리가 바꿔 놓은 현실은 아무것도 없다. 혁명가는 필연적으로 이상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상은 현실과 타협하고 슬굴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이래서 혁명가의 초상은 아름답지만 공허하다.

어쩌면 몇 세기 후의 역사가들이나 저널리스트들은 체의 사진이나 게르다의 사진 속에서 당시의 시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평가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혁명이 보편 정서가 된 적은 없다. 그래서 혁명가는 뒷그늘에는 좌절이란 그림자가 뒤따라 다닌다. 혁명가는 외로운 직업이고 고독한 직업이다. 하지만 그들은 꿈이 있기에 행복하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고독한 혁명가를 발견하기 어렵다. 고독한 혁명가 대신 수많은 지지자들을 거느린 현대판 사보나롤라들이 광신을 퍼트린다. 그리고 어느사이엔가 광신이 혁명을 대체하고 고독한 혁명가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간다. 되려 타락한 선동가가 외로운 혁명가로 둔갑한다. 참 슬픈 세상이다. 그래서 혁명과 광신을 구별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혁명의 정의도 혼탁해진다.

난 혁명을 싫어한다. 하지만 혁명가가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동가의 광기는 분명 증오한다. 혁명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광신과 가짜 혁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혁명을 꿈꾸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혁명인지 선동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내가 혁명을 싫어하는 것은 나에게는 선동과 혁명을 구분할 안목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선동가들이 할 줄 아는 것은 광기를 퍼트리는 궤변의 허약한 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행동력과 자기 확신, 그리고 정열이 없다.

빛은 존재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둡다. 선동가들의 광기는 대기를 혼탁하게 만든다. 광기가 지배하는 칙칙한 어둠 속에서 가끔은 혁명의 순수함을 생각한다. 그리고 혁명가의 초상을 꿈꾼다. 그런데 이제는 혁명가의 초상이 어떤 것이었나 잘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혁명을 잊은 순간 혁명가의 초상도 흐릿해지는 법이란 사실을 왜 몰랐을까? 내일이면 난 또 다시 혁명의 초상을 잊을 테고 글로벌 스탠다드와 자본의 논리, 그리고 힘을 추종하는 꺼삐딴 리가 되어있겠지?

5 thoughts on “혁명가의 초상”

  1. 레닌 봤으면 줘.ㅋㅋ
    무거워서 자네에게 맡겨 두고 벌써 몇해째 못 찾고 있군.

    공부하다가 약간 짜증이 났었던가? 모르겠군.

  2. 우리는 모두 광기와 괘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시대에 진정한 혁명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 되어버렸죠..

    제가 요즘 청강하고 있는 수업 중 “중국근대회화”라는 수업이 있어요. 최근 수업에서 흥미있게 본 그림 중에서 혁명가로서의 모택동과 직장인으로서의 모택동을 그린 작품이 있었어요.

    전자는 1967년 유춘화라는 화가가 모택동의 집권기에 그린 초상화로, 모택동은 혁명으로 나아가는 쭉 뻗은 길로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있어요. 반면, 이 그림을 패러디한 왕흥위의 1995년작에서 모택동은 그가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는 뒷 모습으로 표현되어있지요.

    혁명가로서 당당하던 그의 모습은, 소시민적 직장인의 모습으로 그려졌어요. 이것은 중국이 자본주의로 회귀한 것에 대한 조롱으로 볼 수 도 있으며, 혁명이란 것의 허탈함에 대한 읖조림일 수도 있고, 모택동 자신도 결국 인민을 위한 혁명가에서 결국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 회귀한 것에 대한 비판인 것 같아요.

    만약, Che가 죽지 않고, 모택동 처럼 오래 살았다면 어떨 것 같나요? 모택동 처럼 냉혹한 독재자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끝까지 진정한 혁명가로 남았을까요? 사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후자이길 희망할 뿐이죠..

  3. //wc
    두께도 문제지만 시학사에서 출판된 레닌은 정말 무거워.
    언제 우리집에 놀려와서 챙겨가려구나.

    그나저나 간만에 꿈을 꾸었는데 오랜만에 마감의 압박에 시달리는 꿈을 꾸게 되었어. 물론 마감의 압박이 마냥 생긴 것은 아니고 MFL에게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거든. 이제는 꿈속에 나타날 정도로 많은 기억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지만 밤새 꿈속에서 일하다 지쳐 5시 반도 못되어 일어났다.

    공부하다 짜증난 것은 아니고 신경질을 유발시키는 짧은 순간이 있었어. 잠시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분노나 애정같은 감정은 동격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거만한 격언이 생각나서 참게 되더군.

    //sooaim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에드가 스노우의 < 중극의 붉은별>과 해리슨 솔즈베리의 < 새로운 황제들>을 선물해 주신 적이 있어요.

    사실 처음 두 권을 읽었을 때는 겨우 열 세살 무렵이라 에드가의 글에서 불굴의 혁명가로 비춰지는 모택동이 솔즈베리의 글에서는 권력에 집착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오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혁명 기간동안 보여준 홍군의 정열에 매료되었던 전 오래지 않아 홍위병들의 거친 야만성에 놀라게 되었죠. 지금도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홍위병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고초를 겪은 주언라이가 비행기이륙자세라고 불리는 고문을 마오에게 선보이자, 마오도 따라해보며 어렵겠는 걸 하고 말하는 장면이죠.

    그 순간 이 말은 위트가 아니라 황제의 냉담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과 30여년 전 허름한 동굴에서 낡은 의자에 앉아 홍군의 열정과 혁명의 정당성을 말하던 남자이 용서할 수 없는 변신을 목격한 셈이죠
    (사실 새로운 황제들은 한번 밖에 읽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 주언라이가 맞는지 약간 헷갈려요. 홍군 총사령관이었던 주덕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주덕은 마오보다 나이가 많은데다가 향신층에 속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아니겠죠?)

    혁명의 순수함이 변질되었던 수많은 실례를 알고 있으면서도 혁명의 순수함을 기대하는 것은 독한 광기에 숨이 막히기 때문인가 봅니다. 광기와 광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할 수록, 사보나롤라들의 궤변이 커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져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