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토요일 아침 무거운 마음으로 폴 크루그먼의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이하 에세이)>를 집어 들었다. 사실 내가 경제학에 매달리게 된 것은 스물 두살 늦여름에 이 책을 사고 나서 부터다. 당시의 난 무엇이든 읽음과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는 만용을 마음에 품고 살았는 데 개강을 앞두고 읽은 이 작은 책은 그런 내 자신감을 산산이 무너트려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난 원론 수준의 지식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정보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적합하게 기술할 모델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난 경제학보다 회계와 재무에 미쳐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이자률의 다양한 효과를 논한 짧은 행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50일 뒤면 스물 다섯 살이 되는 현재의 경제학 실력은 꽤나 일취월장한 모양이다. 2년 전에는 난해하게 느껴지던 문장이 이제는 명쾌하게 이해된다. 아니 명쾌함을 떠나 크루그먼의 명석함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제 상황에 대한 감이 잡힌다. 어쩌면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부한 사례와 인용이 불과 하루 만에 이해의 폭을 넓혀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편견과 외우고는 있지만 풀지 못했던 실타래가 명확하게 정리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듯 싶다.

사실 난 21살이 되기 전까지 크루그먼을 몰랐다. 어이없게도 난 크루그먼이 한국에 강연차 왔을 때에야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십대 후반 한국의 외환위기를 진단했던 그의 인터뷰 기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난 경제학과 경영학은 전혀 다른 별개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내 전공인 경영을 탐구하기 바빴다. 사실 처음 보는 수많은 책들의 재미에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설명일 것 같다.

하지만 그 해 여름 형편 없는 나의 경제학 실력을 깨닫고는 책이 아닌 교과서를 통해 원리에 접근해 보자는 결심을 굳힌 것 같다. 비록 그 결심이 실행으로 옮겨지는 데까지 1년이란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요즘에 와서는 크루그먼이 그의 에세이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대다수 전문가들이 <원리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의 실무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에 동감하게 된다. 어쩌면 22살 그 해 여름 나의 부족함을 몰랐더라면 경제학 따위는 재미없고 따분한 수학 놀음이며 학자들이 쌓은 공허한 메아리라는 우리 동네의 사상에 물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직까지 읽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책 <자기조직의 경제>에 비하면 쉽고 간결하지만 <에세이> 역시 만만하게 볼 책은 아니다. 쉽고 간결한 표현과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는 훌륭하지만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사전 지식을 요구한다. 아니 80년대 이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부분의 이슈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만 제목처럼 유쾌한 이야기가 된다.

그의 <에세이>를 이해하는 소수의 선택 받은 독자가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법 많은 과외 공부가 필요하다. 왜냐면 크루그먼은 명석하기는 하지만 똑똑한 학자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남도 알 것이라는-에서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레이건 시대 미국에서 일어났던 공황과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희생했던 경제 성장률. 80년대 물가 안정을 위해 연준이 취한 정책에 대한 비판. 공화당의 감세안과 민주당의 지출확대안. 유럽의 단일 통화 사용.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정책과 동아시아의 97년 위기. 크루그먼이 고른 소재는 귀에 익은 소재이긴 하지만 쉽게 친해지긴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80년대 한국에서 태어난 내가 한참 동네 꼬맹이로 지내던 시기에 일어났던 세계 경제의 굵직한 사건들을 무슨 재주로 알겠는가? 물론 지금에야 알고 있긴 하지만 난 과외 공부에 반년을 투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그먼의 <에세이>는 과외 공부를 해서라도 꼭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비록 98년에 출간된 오래된 책이지만(번역은 2002년)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개념과 소재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난제들이다. 그리고 이런 난제들을 크루그먼만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비단 명쾌할 뿐만 아니라 균형 잡혀 있다.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경제 서술이라고 해야 할까?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는 얇은 두께나 경쾌한 제목과는 다르게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행간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크루그먼이 강조하는 바에 공감하고 행간을 읽어낼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면 이미 반쯤은 <경제적으로 사고하기>에 성공한 셈이다.

게다가 크루그먼의 이 책은 먼훗날 경제 에세이의 고전이 될 소지가 다분한 책이다.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지끔 것 읽은 수많은 경제분석서와 에세이가운데 <유쾌한 에세이>에 필적할만 것은 에드워드 챈슬러의 <금융투기의 역사>와 갤브레이스의 <1929년 대공황>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세 권 가운데 가장 재밌는 것은 챈슬러와 갤브레이스를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크루그먼의 에세이이다. 게다가 이 에세이에서 설명하고 있는 개념과 문제는 우리가 노년이 될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의 삶과 사회, 정치를 지배할 것이 틀림없는 <현안>이다.

어제 작은 누나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유쾌한 에세이>를 읽고 내가 질문 하는 다섯 문제에 대답을 하면 평생 동안 <공부>와 <상식>이라는 주제로 다시는 놀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물론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는 질문자의 특권을 생각해 볼 때 나의 승리가 확실시 되지만, 승패를 떠나 <잘못된 경제 개념>을 되집어 보고 올바른 기준을 잡는 것만으로 누이는 평생동안 신문의 경제 섹션을 보는데 난해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명확한 논리로 경제 현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M_ 개인적인 log| less.. | 막내 누이가 드디어 아르마다를 완독했다. 그리고 이제야 신의 바람이란 사람들의 희망 혹은 믿음일 뿐이라는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근래에는 하인리히 만의 <앙리 4세의 청춘>에 도전 중이다. 이제야 Hericus가 누군지 알겠군하고 생각중이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2000년 임용고사가 끝나고 분명히 읽었다는 기억이 있다. 그럼 재도전중인가?

마음이 어지러워 <영웅전>을 집어 들었다. 한스 오퍼만의 밋밋한 <카이사르>도 읽어주었고 갈리아 전쟁기도 무작위로 몇 페이지씩 읽고 있다(요것은 영어와 라틴어로 나온 빨간 책이라 빨리 읽기는 좀 버겁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책들을 일고 있으면 근거없는 자신감이 마음 속에 가득찬다는 것이다. 뭐든지 할 수 있겠지 하는 자신감이 생긴다._M#]

7 thoughts on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1. 너의 끔찍스러운 기억이 그렇다면 재도전일게야.
    그런데 내가 읽다가 놓아버리기엔 너무 재미있던데.
    혹시 내 저주받은 기억력이 읽어놓고도 모르건아닐까?

  2.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는 질문자의 특권을 생각해 볼 때 나의 승리가 확실시 되지만” <- 글 전체를 읽어도 이 문장만이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습니다. -_-;;

  3. //실
    다는 아니고 2권까지 읽었어. 다음해 봄에 왜 속편은 왜 번역이 안되냐고 나를 다그치기까지 했다고. 그리고 동생보고 <끔찍한 기억력>이라니….

    //닭의 비행님
    삶에는 놓칠 수 없는 재미들이 있죠. 예를 들자면 누님들 놀리는 재미같은 것이 있겠지요. 저 재미는 심부름이나 먹을 것 같은 포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요.

    반드시 이기기 위해 숫가락을 놓을 정도의 난이도로 준비중이랍니다. 원래 내기에 목숨거는 성격은 아닌데 이것 만큼은 이겨야겠어요.

  4. 외손잡이 젓가락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라고.
    그리고 숫가락을 놓다는 곡기를 끊는다.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해야 한다 정도의 뜻이 있는 거라고

  5. 갈리아전쟁기 원서로 읽으시나 보네요;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구할수 있는 책인가요? 아니면 따로 특별 주문을 해야하나요? 영어+라틴어인거죠?
    (질문뿐이네요;;)

  6. 96년쯤. 아마존이 막 나타났을 때 구매한 것이랍니다.
    왼쪽에는 라틴어, 오른쪽에는 영어구요.
    LOEB 시리즈로 불리는 빨간책이죠.

    라틴어는 자주 쓰이는 경구 몇개 이외에는 모르는 까닭으로
    영어로 번역된 부분만 읽었어요. 고등학교때 열심히 번역을
    했는데 5권에 들어섰을 무렵 범우사에서 완역본이 나와버렸죠.

    중앙 도서관에 가보시면 이 시리즈 전집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대출하는 사람이 없다 시피해서 항상 만원이죠. 검색 창에서 저자에 Caesar 혹은 Cicero이런 식으로 찾으시면 쉽게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가격은 24달러 정도 였는데 국내 서점에서는 아직까지 본 기억이 없습니다.(참 책에 따라 가격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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