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雪이 지나다

소설이 지났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기예보를 유심히 보게 된다. 혹여 내일 눈이 내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가볍게 흥분되기도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난 쌓인 눈에 불평을 터트리는 투덜이었는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변한 것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주변의 영향을 컸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짐작할 따름이다.

이상하게도 내 지인들 대부분은 겨울을 좋아한다. 더운 여름보다 겨울이 살기 좋다는 사실에는 나 역시 동감하는 바이지만 눈오는 겨울을 일년 내내 기다리는 지인들에게 맞장구를 쳐주기는 꽤나 어렵다. 스키와 보딩을 위해서 여름부터 허리띠를 조이는 지인들을 볼 때마다 따끈하게 데워진 아래목에 허리를 지지며 이불 속에서 책이나 읽는 내 겨울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참 손가락에 노란 물이 배이도록 귤도 까 먹는다.

(내 친구 중에 한 녀석은 나만큼이나 귤을 좋아했는데 이 녀석의 로망스는 귤을 까 먹어도 물이 배이지 않는 여자 친구를 갖는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매번은 아니지만 가끔은 귤을 건네며 손가락 끝마디를 관찰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친구가 원했던 그런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절친한 여자 친구들에게 했을 때 그녀들은 ‘그럼 까주지 그래’란 한마디로 우리를 바보로 만들었다.)

아무튼 친구들이 장비를 점검하고 시즌권을 구매하는 것처럼, 혹은 외출과 따스한 크리스마스를 나기 위한 준비(?)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나 역시 나름대로의 겨울을 준비했다. 긴긴 저녁 동안 읽을 책들의 긴 리스트도 만들어 놓고 차도 충분하게 비축해 놓았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을 때 홀짝일 보트카 한 병과 갈루아 한 병이 조심스럽게 선반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눈의 마력에 빠져버린 염장 밴드들에게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핸드폰을 가을부터 험하게 다루는 것이다.

겨울잠 하나로 긴긴 겨울을 나는 사람들에 비하면 많은 준비지만 눈을 사랑하는 지인들에 비하면 나의 월동준비는 지극히 검소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랬다. 참. 귤은 절대 미리 사다 놓지 않는다. 박스채 사다 놓은 귤보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조금씩 사가지고 오는 귤이 더 맛있다. 아주머니들에게만 먹히는 외모로 몇 개씩 더 주어담는 것도 이 겨울의 매력이다.

그런데 올해에는 지인들보다 내가 더 눈을 기다리는 듯 하다. 눈이 와봤자 좋을 것도 없는데 마음은 눈을 기다린다. 나에게는 <꽃을 사랑한다> 말 할 용기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으므로 눈을 기다릴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올해의 난 눈을 기다린다. 핸드폰에는 <첫눈이 오면 고백할꺼야> 따위의 유치한 그림배경을 깔아 놓은 채 말이다. 혹 내가 원래 눈을 좋아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올해의 난 눈을 기다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답지 않다. 삼두육비의 괴물 정도는 아니지만 첫눈을 기다리는 나보다는 투덜거리며 허리가 부러진 사람마냥 바닥에 누워 눈물이 나도록 책을 읽는 내가 더 나답다. 하지만 올해는 왠지 눈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생각에 이 맘때쯤이면 진작에 갖췄을 월동 준비도 아직 하지 못했다.

[#M_ 개인적인 log| less.. |참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난 도서관에서 은비령을 빌려 온다. 그리고 사티에의 짐노페티를 들으며 수십번도 더 읽었을 그 소설을 느린 속도로 읽으며 노인의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한다. 그런데 올해에는 왠지 도서관에 은비령이 없을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_M#]

4 thoughts on “小雪이 지나다”

  1. 다음글을 읽으니 아직 계신곳에는 눈이 안온모양이지만 전 어제 첫눈을 맞았답니다. 보기드물게 어수선한 날에 돌풍과 함께 오히려 하늘로 뻗어가는 눈을 보니 어이가 없더군요. 첫눈이란 조심스럽게 음식위에 소금을 뿌리듯이 와야 포근함도 느낄텐데 말이예요.

    첫눈을 보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이 ‘돌풍’ 이어서 올 겨울이 심히 불안합니다(웃음) 가장 심심하고 혼자인 겨울이 될것 같기도 하고요.

  2. 이곳은 첫눈이 꽤나 늦은 곳이예요. 오래된 일기장들을 살펴보면 첫눈이 보통 12월 초엽에나 왔더군요. 내심 보름은 더 기다려야 눈을 보겠다고 생각중이랍니다.

    ‘돌풍’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생각하는 것은 웨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와 정대후문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랍니다. 첫눈이 내리던 날 그곳을 지나가면 눈이 하늘로 뻣어 올라간다는 말이 농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죠. 휴학을 하기 전에 친구와 중도 후원의 벤치에 앉아 건너편의 하얀 절벽에 채우는 눈의 군무를 즐기기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따뜻한 차 한잔과 난로 대용의 친구 하나만 있다면 꽤나 운치있답니다.)

    월요일에는 학교에 잠시 들릴 예정이예요. 학생증 갱신도 해 버리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생각이거든요. 궁벽한 시골서점에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책들도 한껏 사다놓을 예정이구요. 내심 그날 또 눈이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도관 탑에 걸리는 석양과 눈을 사진으로 담은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

    사실 테네사님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솔직함에 매번 놀라게 된답니다. 하나 하나의 포스팅에 장문의 트랙백을 걸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정도로요. 그 세계의 일원이었던 제가 느끼고 괴로워했지만 결국에는 무시하기로 마음 먹은 수많은 묵계들을 테네사 님의 포스팅에서 발견하거든요.

    뭐랄까요. 나에게 일어났던 상황처럼 느껴진다고 해야할까요? <약은 사람들>이 주는 피곤함이 무엇인지 아는 저로서는 해결책 또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냥 읽게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힘 내세요. 쭉쩡이같은 소모적인 다수의 인간 관계보다 소수의 강력한 지지자가 인생에 있어 더 중요한 법일테니까요. 쭉정이들의 배은망덕이 가슴을 찌르는 가시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뵌 적이 없는 저같은 사람조차도 지지가가 되고 싶을 만큼 테네사님의 진솔함은 꽤나 높은 가치가 있답니다.

  3. 폭풍의 언덕! 예전에 수시생 모임에서 처음본 선배가 정대후문으로 내려가면서 얘기해줬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정대가 리모델링 되고 그 옆 길도 너무 예뻐져서 황량한 느낌은 더이상 나지 않는것 같아요. 밤이되면 조명덕에 정말 너무 예쁜데.. 기뻐해야 하는건지 아쉬워해야 하는건지 모르겠네요 -_-;

    음, 학생증을 바꾸신다고 하셔서 그러는데요, 학교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지금 접속이 안되네요. 스마트 카드로 교환하는게 어제(금요일)까지였거든요? 다음주도 추가신청이 되려는지.. 하도 원성이 많아서 다음주까지 신청기간을 연장해 준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잘 모르겠네요. 공지사항에서는 못본것 같아서요. 어쨌든 신분증 앞면 사본이 필요하니 꼭 가져 가시길 ^-^ 오랜만에 학교 오시는듯 한데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네요. 저도 사진찍는건 좋아하는데 생각해보면 학교사진은 거의 안찍었는듯.. 나름대로 사적이라는데 말이죠. 멋진 사진 찍으시면 좀 보여주세요.

    그리고.. 아이고 칭찬 감사합니다. 실은 하이얌님 글 팬이었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받아서 너무 기쁘네요 감사해요. 하지만 이런 직설적이고 지나치게 솔직한 모습에 크게 도움받지 못하고 살고 있답니다 ㅠㅠ 아직 학생이라 괜찮지만 너무 세상에 닳아서 끝이 뭉툭해지면 안되는데 걱정입니다.

  4. 다행스럽게도 12월 10일까지로 연장되었답니다. 대신에 하나은행에서 직접 신청해야 하는 것으로 변했구요. 일기 예보를 보니 날씨가 풀린다는 말에 사진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 겠네요.

    12월 새벽 1시 반을 살짝 넘어서 시야에 있는 형체라고는 자신의 그림자 밖에 없을 시간에 학교를 돌아다녀보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정말 아름다워요. 예전에 마감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종종 그 시간 산책을 즐기고는 했는데 벌써 두 해 전 이야기네요.

    진짜 진솔함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맵고 쓰지만 자신에게 솔직한 진솔함은 치열함을 이끌어 내는 힘이 되죠. 힘내세요. 겉으로 늘어나는 모습은 무뎌지더라도 진짜 진솔함을 지키면 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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