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C.I.

첫눈이 내리고 있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눈인지 빗방울인지 구분하기 힘든 정체 불명의 낙하물에 감정이 고양된 친구는 첫눈이 오면 어떤 생각을 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난 무의식중에 <질레트 라임향 면도 크림>이 생각난다고 대답해 버렸다. 실망한 친구의 마음이 전화기를 타고 귓가에 전해졌다. 나라면 첫눈이 오는 날의 키스라던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모호한 추억담을 늘어놓을 것이라 믿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첫눈이 오면 생각나는 것은 정말 <라임향 면도 크림> 하나뿐이다.

가족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난 눈이 내린 날이면 꽤나 정성껏 면도를 한다. 평소에는 상황에 따라 면도를 미루기 일 수지만 눈오는 날 만큼은 한번도 면도를 잊은 적이 없다. 아니 평소보다 더 신경써서 면도를 한다. 목에서 턱까지, 뺨과 광대뼈 바로 아래 지점까지 파이브 어클락 쉐도우가 오늘만큼은 드러나질 않기를 빌며 면도를 한다. 사실 친구의 전화를 받고 있는 그 와중에도 난 촘촘한 턱수염을 만지며 지금 눈이 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손끝에 꺼칠하게 느껴지는 수염의 감촉이 정말 싫었다. 눈오는 날이면 반드시 깔끔하게 면도된 얼굴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기억하고 나서는 허탈하게 웃었다.

요즘은 면도 크림 대신에 젤을 쓰지만 꽤나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던 면도 크림은 질레트의 라임향이었다. 소년에게 파이브 어클락 쉐도우의 존재를 알려준 소녀는 첫눈이 내리는 날 그에게 라임향 면도 크림을 선물해 주었다. 소년은 그 후로 다시는 전기 면도기를 쓰지 않았다. 삶이 번잡해 질수록 면도를 빼먹은 날은 많아졌지만 전기 면도기와 타협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라임향은 레귤러 크림으로 변했고 몇년 후에는 젤로 변했으며 이제는 멘솔향 젤로 변했지만 눈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면도를 한다. 하루 종일 파이브 어클락 쉐도우가 나타나지 않기를 빌며…

다행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궁벽한 시골은 개활지인데다가 따뜻한 남쪽이라 눈대신 비가 내렸다. 면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쉴새 없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걱정하던 나는 안심해도 좋을 터였다. 하지만 기억의 수렁 속에서 행동의 자유를 잃은 나를 발견하고는 목격하고는 착잡함에 사로 잡혔다. 첫눈에 라임향 면도 크림을 떠올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걱정하는 내가 어리석어 보였다.

하루 종일 속이 상한다. 지나치게 기뻐하는 일도 슬퍼하는 일도 모두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정말 마음이 많이 상했다. 사실 마음은 상했는데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까닭없이 내 삶이 허탈해졌다.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지박령이 된 듯한 기분에 마음이 상했던 것일까?

아무튼 이런 마음 상함은 나를 은둔으로 몰고 간다. 책과 음악 속에, 한 몫 단단하게 잡아 보기 위한 위험한 시험 속에 숨어 내 마음과 마주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베르떼와 로맹 가리의 소설, 두 권의 실용 서적과 다량의 문제집 틈에 새해가 될 때까지 숨어 있어 볼까?

2 thoughts on “Ex C.I.”

  1. 한때 시즌방까지 잡았었는데…
    이제 나이가 있으니.

    월요일이 기대되는 군.
    주말은 설레임에 훌쩍 지나가 버릴 듯 해.
    화이트와인 있으니 한병쯤 챙겨 가시게.

  2. 익스트림을 즐기기에는 몸이나 마음이나 전부 늙어버린 거지.
    2002년에는 밤새 영화보고 스키장으로 뛰어가던 너였는데…
    그나저나 현재 공식적으로 난 금주상태라고.
    (이런 것은 sms로 살짝 귀뜸했어야지)

    아무튼 월요일 아침일찍 가겠네. 여기저기서 버림받으면 자네 따라서 청강이나 해야겠군. 그나저나 보고 싶었던 전시회가 있었는데 내년 봄까지 한다는 사실에 안심하고는 그냥 까먹어 버렸어.

    참 골든독은 다시는 안가기로 맹세했으니 S에 가서 커피는 변제해주게나. 그럼 월요일날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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