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몰락-Rubicon

플루타크의 <영웅전>
내가 가진 <영웅전>은 80년대 후반에 출간된 유난히 작은 글씨가 매력적인 낡은 판본이다. 사실 이 <영웅전>은 9살 꼬맹이가 스스로의 용돈으로 처음 산 책이었다. 하지만 꼬맹이치고는 운이 좋았던지 이 낡은 판본은 이른바 편집본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난 [어린이를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순혈의 <영웅전>으로 내 독서 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영웅전>은 어린 시절 내내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 당시의 나는 필로포에멘을 좋아했고, 카이사르에게 열광했으며, 카밀루스와 포프리콜라의 흥미로운 성격에 매료되었다. 알키비아데스의 모순적인 성격에 반했고, 불우한 <찌그러진 콩>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영웅전>이 미친 영향은 단지 이것뿐이 아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난 자유라는 말에 호감을 가졌고, 반란과 술책, 전쟁과 협상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케이스를 모두 알아버렸다. 남색과 엽색 행각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았고 참수와 숙청이라는 단어를 알아 버렸다. 어린 시절 조숙한 늙은이가 되어버렸다고 스스로를 한탄하게 만든 세계관을 꾸며 낸 것도 모두 <영웅전>의 영향력이었다.

아니 <영웅전>의 영향력은 이 정도가 아니다. 세계관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사고력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성격을 만든 것도, 어느 책이던 거뜬하게 소화해낼 수 있다고 믿는 조금은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도 모두 <영웅전>의 탓이다.(사실 사기의 역할도 컸다. 개인적으로 난 열전을 더 좋아했다)

공화국 로마인과의 대면
갑자기 난데없이 <영웅전> 타령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게 된 것은 모두 오늘 읽는 <공화국의 몰락> 때문이다. <공화국의 몰락>을 읽으면서 난 어린 시절 내 정신을 단련시켰던 수많은 책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오랜만에 지적 허영심을 채워줬다. 하지만 <공화국의 몰락>이 채워준 것은 단순한 허영심만이 아니다. 이 책은 수많은 책들을 읽었음에도 좀처럼 다가서지 못했던 로마인들을 바로 코앞에 데려다 놓는 마법 같은 재주를 부렸다. 오랫동안 야만인과 문명인의 기이한 혼합물로 이해되던 로마인들을 이해하는 문이 활짝 열린 셈이다.

사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과 제정 시대의 로마인은 완벽하게 다른 민족처럼 느껴진다. 공화정 시대의 저술과 제정 시대의 저술을 읽어보면 그 차이는 명확하다. 두 시대를 동시에 경험한 로마인이 아닌 나로서는 단지 느낌상의 발견일 테지만 두 시대의 로마인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을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벅찬 숙제였다. 제정 시대의 로마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야수성이 그들의 혈관에 녹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몰락>은 공화정 로마 시민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현대적으로 해석된 <영웅전>이다. 하지만 현대판인 만큼 기술에는 냉정함이 묻어난다. 저자는 로마인에 대해서 호의를 베풀기보다는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을 바라봄으로써 일부 현대인들을 비추는 거울을 제공하려 한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수록 그 일부 현대인에 내가 속한다는 사실은 점차 분명해 졌다.

저자가 분석하는 공화정 로마의 실체는 모순성과 열광의 기이한 조합이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공화정 로마는 경쟁 사회이면서도 제한 사회의 본질을 유지하려 애썼고, 타의추종을 불허할 개방성을 자랑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폐쇄적인 사회였다. 그들은 영광과 위엄을 추종했으면서도 영광과 위엄에 따르는 비용을 냉정하게 계산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과 대면하는 것은 꽤나 아찔한 경험이다. 이천년이란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본성을 우리 안에서 똑같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공화국 & 시민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공화국>과 <시민>이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보자면 그것은 <사회>와 <개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공화국>과 <사회>는 현대적 언어로는 분명하게 다른 개념이지만 로마인들이 생각했던 <공화국>과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사회>는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어쩌면 공화정 말기에 축적된 로마인들의 모순과 혼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직 일부 현대인에게만 허락된 특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고민이나 그 시대 로마인들이 직면했던 고민이나 본질은 똑같다. 그리고 이런 동질성은 역사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느 시대에나 한결 같은 인간성의 본성을 어떤 각도에서 조망하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이단에 귀가 솔깃해지는 동기를 제공한다.

<공화국의 몰락>은 상당히 균형 잡힌 서술을 제공한다. 사실 로마의 역사는 카이사르라는 독특한 인물에 시선이 집중되면서 카이사르의 주변인들이 부당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카이사르를 옹호하는 측이던, 경멸하는 측이던 공화정 로마의 다른 시민들에 대해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하지만 <공화국의 몰락>은 <영웅전>만큼이나 공정하다. 카이사르의 적들 혹은 동료들 그 누구도 이 책에서만큼은 부당한 대접을 받지 않는다. 오랜 시간동안 잊혀져 있던 <영웅전>의 미덕(현대적 미덕이 아니다. 재능과 덕성을 포함하는 고전적 의미의 미덕이다)을 이 책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실 난 9살 때부터 <영웅전>을 읽었고, 수십 번을 반복해서 읽는 동안 거의 외우다시피 했지만 <영웅전>을 이해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15년이란 긴 시간동안 난 <사실>을 외우고 있었지만 영웅들의 동기와 그들의 행동에 내재된 숭고함과 비열함의 기이한 조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공화국>과 <시민>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공화국의 몰락> vs <카이사르의 죽음>
올해 출간된 <카이사르의 죽음>과 <공화국의 몰락>은 동시대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흥미로운 시각차를 보여주고 있다. <카이사르의 죽음>이 현대인을 중심으로 공화정 로마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면, 그리고 이런 시도를 통해서 현대인에게 피드백을 주려는 의도로 쓰여졌다면 <공화국의 몰락>은 공화정 로마인을 중심으로 일부 현대인들이 몰래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카이사르의 죽음>이 정치 기술적이라면 <공화국의 몰락>은 정치 사회적이다. 공정성에 있어서는 <공화국의 몰락>이 뛰어나지만 실용적 측면에서는 <카이사르의 죽음>이 더 유용하다.

하지만 이런 배경에는 예일과 옥스퍼드라는 두 저자의 학문적 배경 차이도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예일을 배경으로 탄생한 <카이사르의 죽음>은 실용적이긴 하지만 사료의 사용에 있어서 독선적이다. 옥스퍼드를 배경으로 탄생한 <공화국의 몰락>은 다소 신랄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료에 충실하다(부분적으로는 영국의 현대 로마사 전문가들이 형성해 온 선입견이 다소 방만하게 들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이나 <공화국의 몰락>이나 모두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는 것은 똑같다. 포퓰리즘이나 모순적 평등과 잔인한 경쟁 모두 우리를 갑갑하게 옥죄이는 족쇄임이 분명하니 말이다.

2 thoughts on “공화국의 몰락-Rubicon”

  1. 좋은글 감사합니다. 점심먹고 잠시 들어와봤는데 책 표지에 조각 잔뜩 있어서 눈요기 잘 했네요 ㅎ_ㅎ

  2. 이제 슬슬 시험이 시작하겠네요. 친구들 말로는 슬슬 중도관과 열람실이 차기 시작했다고 하던데…

    술라 옆에 조각과 우측 상단의 조각은 누군지 모르겠어서 고민중이랍니다. 예전에 즐겨찾던 조각 싸이트가 사라지는 바람에 막막한 와중이예요. 폼페이우스 두상을 보면 젊어서 미남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구요. 아무튼 표지 디자인에 사용된 조각이 은근히 재밌어서 저도 꺼내놓고 자주 보게 되네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