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학교에 다녀왔다. 참사리길 끝에 있는 아이스크림가게에서 WC군에게 토피크림을 강요하던 우리는 이내 지선군에게 보낼 엽서를 썼다.(난 아직도 민트 초코칩을 먹고 있었다) 백 팩에서 자연스럽게 엽서가 나오는 WC군에게 놀랐지만 그런 전과야 나도 있으니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아니 마음을 헤아리는 대신에 난 어느 해 늦가을 이곳에서 500미터 떨어진 벤치에 앉아 엽서를 쓰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학교를 파하고 브람스의 클라리넷 사중주를 들으며 집에 가는 길에 마주치는 빨간 우체통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던 수백일 전이 떠올랐다.


WC군의 엽서, 아니 우리의 엽서를 보는 동안 헤세가 그린 수채화 엽서가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받은 파스텔로 채식된 엽서도 떠올랐다. 사내에게 받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엽서의 주인은 사내가 아니었다. 단지 사내처럼 스스럼없는 사이였을 뿐. 갑자기 하나양이 그림을 잘 그리거나 피아노를 잘 치는 남자는 꽤나 멋지다고 말했다. 악기와 그림을 배우고 싶어졌다. 멋지다는 말에 집착할 시기는 지났지만 아직도 난 멋지다는 말에 배고프다. 멋지다는 단어와 난 별로 연관이 없어서 더욱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 남은 토피 크림을 WC군에게 강요하며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하나양과 날렵해진 정섭군은 나라면 틀림없이 나비효과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러 가자고 할 것 같았다고 말을 건넸다. 자기들이라면 <지우개>나 <여선생 여제자>같은 것을 보러 가자고 했을 거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사실이 그랬다. 난 가볍고 유쾌한 것보다는 무겁고 둔중한 것을 더 선호한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영화를 봤다. 충무로에서 종각까지 걸었다. 서점에 들렸고 미신에 잠시 움츠렸으며 용산역 광장에서 WC군과 커피를 마셨다. 차갑고 습한 바람이 불었지만 친구와 아메리카노가 있기에 춥지 않았다. 그러다 WC군에게 물어봤다. 지금의 내가 나다운 것이냐고. 타인에게 엄격한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로서는 한번도 위험과 불확실성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불확실성에 나를 내맡기는 위험을 자초하는 내가 나다운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WC군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지금 내 행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마음은 종종 스스로를 속이지만 몸은 한번도 나를 기만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음 가는 대로 몸이 가는 것이 아니라 몸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것인 것을 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 속을 채운 먹물은 가장 깨끗해야 할 마음마저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니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몸이 가는 방향 밖에 없는데 난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이다.

지기가 선물해준 화이트 와인을 오른손에 집어 들고 기차에 올랐다. 밤기차 특유의 주향이 뺨에 닿았다. 오프너만 있다면 나 역시 그들에게 합류할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난 술친구를 기다려야 한다. 그녀가 오려면 하룻밤을 자고, 하룻밤을 또 자야 한다. 하지만 녀석이 오는 그 날 난 달콤한 술에 빠져 花를 사랑한다고 마음껏 투정부릴 수 있겠지.

기차의 속도가 빨라진다. 새벽부터 시작된 부산함에 지친 나는 열한시도 되기 전에 잠들었다. 왼손에는 머리를 기댄 채로, 오른손에는 와인 병을 쥔 채로.

7 thoughts on “외출”

  1. 유난히 키워드가 눈에 띄는 구나.
    예쁘게 바꾸었구만.^^

    하지만,
    왠지 스타일이 ‘어떤 녀석’의 분위기가 나는 군.

  2. 스킨 바꾸셨군요. 저도 이 스킨 진짜 이뻐서 쓸까 하다가, 마치 바지만 맨날 입다 치마입는 것 같달까요; 너무 예뻐서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이얌님이!!

  3. //WC
    ‘어떤 녀석’ 생일 선물은 생각해 봤냐?
    주말에 teps보러 가는 길에 전통문화보존지구에 들려 비녀를 사볼까 생각중인데.
    종이 인형도 괜찮겠지만 바다 건너가는 과정에서 망가질 듯 싶어.
    빗과 비녀 시리즈로 우리 밀고 나가볼까나?
    아무튼 고민 좀 해보라고.

    //닮의 비행님
    제가 예쁜 것에 무지 약하거든요.
    그리고 지금껏 바지만 입어왔던 터라
    이렇게라도 치마를 입어봐야 균형추가 잡힐 것 같아서요.
    아무튼 방문하시는 분들의 오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사진 공개했습니다.
    (공개 후 눈에 띄게 방문객이 줄었군요. 기대 이상의 효과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는데 스킨 소스 정리가 잘되어있더라구요.
    따로 고치고 커스터마이징할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길래
    12월의 심심한 월요일밤 전격적으로 결행해 버렸답니다.

  4. 그녀석을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화려하다는 점에서는 그녀석에게도 어울리겠지만,
    자줏빛이 많이 섞였고, 또한 굴곡이 많은 디자인은
    웨이브 머리칼이 연상되더라고…

    기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니 오해 말기를.
    다만 생각을 말한 것 뿐이니..ㅋㅋ

  5. 당했군. 일부러 딴청부렸는데 이렇게 확인까지 해버리면 내가 부끄럽잖아?
    못본 사이에 컬이 더 화려해진 모양이군. 지난 1년반동안 겨우 8시간 남짓 봤을 따름이니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라고.

    방금 자네 코멘트를 읽고 든 생각인데 어쩌면 우리는 평생동안 자줏빛을 볼때마다 녀석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줏빛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을 무척이나 많이 알고 있음에도…

    아무튼 다른 의도가 있어서 이 스킨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6. 자네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네.
    다만 내가 직설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솔직한 내 감정을 토로한 것 뿐일세.
    그리고 연보라빛은 여성의 호르몬을 활발하게 분비한다고 하더군.
    이 스킨을 씌운 이후로 여성 독자들의 발걸음이 활발해질 듯 하네만…^^

    컬도 화려해졌을 뿐 아니라 상당히 많이 자랐다.
    그래서 매우 풍성해 보이더군.
    나만 그녀석이 생각난 것이 아니었나봐.ㅋ

    이런저런 생각을 떠나서
    이 스킨 정말 이쁘군.
    언젠가 이런 분위기가 나는 다이어리를 사려고 했던 일이 있는데
    역시 사내녀석이 들고 다니면 주위의 눈초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
    포기해버린 일이 있었지.
    핑크에 대한 열망 이후로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색이
    있다면 그건 바로 퍼플…ㅋㅋ

  7. 이런 이런. 이래서 우리가 여태 혼자인 거야.
    가끔은 거짓말과 알면서 넘어가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금 네가 내 마음 속에서 일으킨 파랑이 점점 커져가고 있어.

    알다시피 내 기억력이 상당하잖아. 모른 척하고 있을 뿐 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너의 짧은 문장으로도 내 기억 속에서는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녀석의 형상이 보여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고, 녀석의 표정과 어조의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지며 그 옛날 내가 미치도록 갈구했던 그 모든 것이 생각난다고.

    사소한 것도 잘 까먹지 못하는 내가 한ㅤㄸㅒ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는 노릇아니겠어? 그러니 여기서 그만. 더 이상 떠오르면 난 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번민하는 불쌍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아무튼 이 스킨 덕에 방문자 수가 늘어날 것이란 자네의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귀뜸해주고 싶군. 스킨의 효과를 억제하기 위해 일부러 내 사진을 걸어 둔 것이라고. 아무튼 아래 광고 카피같은 뉘앙스의 마지막 문자을 제외하고는 나 역시 네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이야. 늑대같은 사내 녀석들의 비아냥 때문에(사실은 본인들도 좋아하면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상당히 많은 기호를 제한당하고 있다고.

    데낄라 선라이즈를 좋아하는 나에게 그런 칵테일은 여자나 마시는 것이라는 비난을 일삼던 사내 녀석들 덕분에 바에 갈 때마다 석류 시럽을 듬뿍 맛보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야. 아무튼 나의 기억력을 자극해 지선군이 오기도 전에 나에게 술맛을 보게 할 셈이 아니라면 자주빛과 컬에 대한 이야기는 멈추자고…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