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넷. 그 마지막 날

시간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훌쩍 지나갔던 스물 넷도 이제 몇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일년을 요약해 보자면 몇 권의 책과 몇 권의 수험서, 두 번의 콘서트와 몇 번의 전시회, 몇 병의 술과 더욱 친해진 몇몇 지인들로 정리할 수 있을 듯 싶다. 사실 스물 넷의 내 삶은 가장 의욕적이고 가장 평온했던 한 해였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힘겨운 일도, 나를 잃어버린 채 몰두할 그 무엇도 없었지만 단조롭고 완만한 일상 속에서 수도사의 기쁨을 느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느낀 단조로움은 진짜 단조로움이 아닐지도 모른다. 스물 셋의 내 삶이 너무 복잡하고 마음 아픈 것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고 덜 아픈 스물 넷의 한 해를 단조롭다 평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던 간에 올 한해 동안 난 정말 잘 해주었던 것 같다. 크게 분노하는 일도, 좌절하는 일도, 스스로를 방기하는 일 한번 없이 무사히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 나이가 자랑은 아니지만 크게 아프지 않고 이십대 중반에 들어선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

하지만 잃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없이 자유롭던 여유를 잃었으며, 시간이 주는 유용함을 잃어버렸다. 추억과 애틋함을 망각에 밀어 넣었고, 합리성이란 기준을 토대로 trade off 게임을 남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La Tierra del Sol을 들으며 슬픈 기분에 잠긴다.

스물 다섯에는 내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모든 잠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실행력과 의지를 갖춘 사람이 되기를 빈다. 행운에 삶을 통째로 내맡기는 빈곤한 도박사가 아니라 행운의 외면에도 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으로, 사랑으로 인해 마음 아프지 않고 단조로움 일상에 지겨워 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마법처럼 내가 꿈꾸는 모든 일들이 손쉽게 이루어지는 그런 삶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 길에 끝에 설 때까지 내가 겪을 긴장과 노고의 무게가 조금 가볍기를, 너무 늦지 않기를,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를 빈다.

[#M_ 친구들에게 | 한 해 동안 우리 정말 잘해주었어! |

또 한 해가 지났어. 이제는 스물 다섯. 시간에 쫓기고, 마음에 쫓기는 그런 나이가 된 듯 싶어. 시간이 주는 현명함이란 선물이 눈가에 내려앉았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았던 한 해가 흘렀지. 지난 한 해를 순조롭게 넘긴 것처럼 내년 한 해도 순조롭게 넘겼으면 좋겠어. 아프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무엇보다 마음의 그릇이 깨져버리는 불상사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주 가끔 신이 나에게 허락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친구가 아닐까 해. 늘 강한 척 하는 나지만 너희들이 있기에 외롭지 않아. 너희들이 나를 신뢰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타인의 시선에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대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성격 모난 친구 덕분에 고생했을 너희들에게 미안해. 내년에도 고생시킬 나를 알기에 더 미안해.

내년에는 우리 모두 노력한 만큼은 꼭 성취할 수 있는 한해 였으면 좋겠다. 학업도 사랑도 그 어떤 것도 노력한만큼은 되받아낼 수 있는 정직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어. 긴장과 초조함을 삶이 주는 특별한 향신료쯤으로 감내할 수 있는 신경 굵은 사람들이 되기를 빌고, 무엇보다 스물 다섯에는 스스로가 걷는 길에 확실을 가지는 한 해였으면 좋겠디. 스스로의 길에서 빛을 찾아내고 그 빛에 취해 남은 삶을 보낼 수 있는 인생의 전기가 아침처럼 찾아오기를 바랄께.

내일 태양이 솟아 오를 때 지난 삶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다가올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자. 치열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그럼 오늘 하루는 지난 일년 동안 군소리 없이 따라와 준 몸과 마음에 짧고 너그러운 휴식을 선사하기를 빌며.

_M#]

3 thoughts on “스물 넷. 그 마지막 날”

  1. 나이든다는 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저는 이제 이십대와는 영원히 안녕을 고하게 되었어요. 서운하고 슬퍼요. 이십대를 마치 피터팬 증후군 환자처럼 살아왔던 것 같아요. 서른이 된 이제서야 어른이 된다는 느낌이 들기시작해요. 참 늦죠?

    참.. 저 1월 6일에 출국해요. 아직까지도 학업이 과연 나의 길인가? 에 대한 의문이 남지만…이제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감이 절실히 느껴지네요. 그동안 공부를 취미 생활로 생각해왔지만, 앞으로는 공부가 나를 경제적, 사회적으로 지탱해 주어야 해야 한다는..절박함도 느껴져요.

  2. 안녕하세요 벌써 신년이네요.^^ 글 늘 즐겁게 읽고 가고 있었습니다.신년인사를 드리러 다니고 있는데 여기다 남겨도 괜찮겠지요? 무엇보다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모두 잘 되고 즐거운 일 가득한 한해가 되시길 빌게요.올 한해도 잘 부탁드려요.

  3. //sooaim
    어린 시절에는 스무살에는, 아무리 늦어도 스물 다섯에는 매우 특별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이를 먹을 수록 아직 멀었다는 생각만 들어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른이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구요. 어른이 되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른의 책임감을 가지는 것 그 자체도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남은 이십대는 정말 효율적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있답니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나이를 먹어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렸을 때 그 극의 조연이 아닌 주연이 되려면 지금 노력해야 할테니까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와 제 친구들은 항상 지난 시간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괴로워하는 것 같아요. 알량한 머리와 대책없는 자신감만 믿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공부할 기회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은 것이죠. 삶을 되돌릴 수 있다면 모든 욕망을 뿌리치고 공부에만 매진하겠다고 되뇌이곤 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예전에 친하던 교수님 한분이 공부에도 아마추어와 프로페서널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남들 다하는 공부를(가량 수능이나 대학의 전공이 되겠죠) 하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그가 추구하는 것은 리버럴 아츠에 불과하다고 하시더라구요. 남들이 다하지 않는 공부를 무언가를 포기해가면서 하는 사람은 프로페셔널에 속한다구요. 프로페서널의 공부에는 아마추어가 이해하지 못할 깊이와 절박함이 뒤따르지만 프로페서널의 세계에 뛰어들기로 마음 먹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하시더라구요. 요컨데 프로페셔널의 공부는 making decision하는 과정이 어렵다는 요지였던 것 같아요. 힘내세요. 힘껏 성원해 드리겠습니다.

    //모종의 인물
    네.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일년이 지나고 새해가 왔네요. 아침에 눈을 뜨고서야 새해라는 실감이 나는 것 같아요. 모종의 인물님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잘되시기를 빕니다. 자주 찾아주세요. 올 한해도 잘 부탁드린다는 말은 아무래도 제가 해야할 말 같습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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