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의 움직이는 성

지난 연말 왕년의 [미래 소년 코난]의 멤버이자 [빨간 머리 앤]의 애청자였던 우리 형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를 보러 극장을 향했다. 형제가 들뜬 마음으로 극장을 향한 것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2] 이후 보름만의 일이었다. 사실 우리 형제는 함께 놀러다니는 것을 즐긴다. 함께 영화를 보는 것도, 함께 책을 읽는 것도, 구석진 작은 방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것도 모두 우리 형제가 즐기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어린 시절, 국경일 오후 무렵이면 방영되던 [미래 소년 코난]은 우리 형제의 애청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나이 차이가 제법나는 큰 누님은 맥가이버가 같은 외화물에 심취해 있었지만 나머지 누나들과 난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이 만화에 묘한 매력을 느꼈던 듯 싶다. 하지만 우리 형제의 주시청 프로그램은 정작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빨간머리 앤]. 늘 숨겼던 사실이지만 난 로보트 만화보다 [빨간 머리 앤]이 더 재미있었다. 어쩌면 [오 길버트!]라는 누님들의 외침 뒤에는 소리가 나지 않는 나의 [길버트!]가 늘상 따라다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 앤을 따라 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고, 책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를 읽게 만든 것도 모두 앤 셜리의 덕분이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코난이 하야오가 그린 것은 맞는지. 빨간머리 앤을 그린 작가가 하야오와 어떤 관계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재패메이션에 대한 숭배의 시기는 덧없이 짧은 것이었고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렬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수많은 사람들이 재패메이션의 강력한 추종자가 되어 갈 수록 난 책과 문학에 빠져들었다.

사춘기 소년에게 누구나 관심을 갖는 것은, 다시 말해 유별날 것이 없는 기호란 없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샴푸와 스팅을 좋아하던 것도, 워크맨에 폴로네이즈를 꼽고 다니던 것도 알고보면 듀스와 서태지에 열광했던 또래와 달라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재패메이션도 그와 같았다. 모르지는 않지만, 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모른 척하는 편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편안했다. 혹평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 형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하울을 통해 난 붉은 돼지를 보았고, 멋쟁이 길버트를 발견했으며, 소피를 통해서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들의 흔적을 보았다. 음악은 듣기 좋았으며, 색감은 풍성했다.

그런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껏 하야오가 보여주었던 작품들과는 다르다. 선과 색은 유사한데 인물에게 부여된 캐릭터와 이야기의 전개 양식이 다르다. 하야오의 펜을 빌린 다른 이의 작품이라고 해야할까? 지금껏 그가 보여준 이야기의 연장선상이라고 하기 보다는 되려 몇십년 전의 하야오를 보는 기분이다. 하야오가 그린 환타지는 사람 냄새가 나면서도 어딘지 이질적인 분위기가 풍기는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전과 다르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인 느낌이 난다고 해야할까?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노대가는 앞으로 미적거리는 걸음을 옮기기 보다는 큰걸음으로 뒷걸음쳤다. 하지만 큰 뒷걸음이 멈춘 곳은 태초의 사랑과 건강함이 묻어나던 시작점이었으며 멋진 벚꽃과 소녀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던 꿈이 남겨진 공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지난 수십 년의 시간이 이 노인을 힙겹게 만든 뒤에야 그는 미적미적 나아간 걸음을 후회하며 뒤를 되돌아 봤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뒷 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다음주를 기다리던 그 옛날 소년의 마음으로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이런 나의 기다림은 예측력과 이해력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모범생 컴플렉스의 발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던 간에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뛰어난 작가인 하야오의 작품이 아니라 탁월한 이야기꾼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구성진 말솜씨이다. 고민하는 대가보다는, 고민으로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예술품을 만드는 공장보다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꾼이 더 좋아진 것은 한 살을 더 먹은 나이 탓인지, 어려운 시절 탓인지 다소 구분이 어렵긴 해도 말이다.

2 thoughts on “하울의 움직이는 성”

  1. 어쩐지 궁상스러운 걸.
    < 몽테크리스토백작>은 몇권까지 읽었는가?
    어제 저녁에는 나도 갑자기 읽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살짝 참아 주었어.

    이제 330일 남았다. 시간이 예상외로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고 있어.
    한 일이라고는 공부 약간 한 것 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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