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rmur

1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라는 사실을 새벽 2시경 임프리마투르의 마지막 챕터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늦은 밤 난데 없이 도착한 문자 메세지. 하지만 딱히 어떤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초콜릿을 곁들여 먹고 싶다는 생각만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발렌타인 데이의 조건 반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커피와 초콜릿 대신 카스트라토 사제와 난장이 사환으로 이루어진 콤비의 모험에 홀딱 빠져 있었다. 아주 오랜 만에 정신은 긴 휴식을 필요할 정도로 활기를 잃었고, 잠은 오지 않았으며, 몸은 무거웠다. 아침에 코피가 났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봄이 오는 것을 아는가 보다.

2
어제 저녁에는 콘스탄틴을 보았다. 키아누 리브스의 뾰족한 턱과 섬세한 갈비뼈, 투명한 손을 보고 감탄할 누군가가 생각났기에 음산하게 웃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가 레이첼 와이즈를 볼 수 있어서 좋았던 영화. 그녀는 Stealing Beauty에서부터 발렌타인의 설레임을 잃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좋아하는 배우다. 친구의 표현에 의하자면 검정 브라가 제일 잘 어울리는 배우라나? 몇년 만에 이제는 스치기 조차 힘든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마음 한 쪽에서는 이런 대화에 관한 기억 자체가 치졸하고, 추하며, 온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키아누 리브스의 얇고 긴 몸매를 보며 멋지다고 속삭이던 누군가가 생각나 온당한 마음을 찍어 눌렀다.

3.
오랜 만에 그곳과 관련된 일을 했다. 사실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내 모든 애정과 헌신을 받쳤던 그곳의 일조차 입으로 뱉은 말을 줍기 위해 번잡함과 귀찮음을 애써 참아내는 진짜 <일>이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때로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라는 사실을. 내가 만들어 낸 결과는 시간의 흐름 속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 몰락을 슬퍼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니 그곳은 제가 몰락하는 것조차 모른다. 슬프지만 더 이상은 아파하지 않을 참이다. 현실은 부스러져도 추억마저 그러란 법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더 이상 실망할 것도 그 어떤 것도 그곳에 남아 있지 않다.

4.
귀가하는 길에 초콜릿을 구입하는 사내들을 목격했다. 스파케티 재료를 사는 동안에 나 역시 장바구니에 패키지로 포장된 초콜릿을 하나 집어 넣기는 했지만 초콜릿 중독을 달래기 위해 990원짜리 초콜릿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과 제과점에서 만든 초콜릿을 포장까지 섬세하게 고려하며 구매하는 것은 격이 다르다. 어쩌면 그들은 그 초콜릿을 자랑하거나 선보이며 자신의 시들지 않는 인기를 과시할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가 때로는 더 괴로운 날이 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에 대한 진지한 신뢰감도, 초콜릿을 선물할 애인도 없는 사내라면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위한 초콜릿을 직접 사야하는 그런 세상이 된 모양이다.

5 thoughts on “A Murmur”

  1. 발렌타인데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여성이 남성에게 주는 날인지는 방금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초콜릿을 산 사내는 모두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랍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발렌타인데이라는 핑계로 초콜릿을 사서 선물하기도 하죠

  2. 너무 일찍 잤더니 새벽에 깼다. 잠이 안와서 스킨 이미지 바꿔봤는데…
    너 줄려고 만든 거니까 가져다 쓰려면 써라.
    일단은 누나 블로그에 적용시켜놓았다.

  3.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원래의 취지와 다르게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죠. 세태에 보다 충실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초콜릿을 샀다는 해석보다는 자신의 것을 직접 샀다는 해석이 보다 현실을 많이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해석과 별개로 그 초콜릿이 우울한 용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기쁘게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네요. 제가 오해한 쪽이 누구에게나 좋은 결론일테니까요.

  4. 어린 시절 발렌타인데이가 무슨 큰 일이라는 듯 호들갑을 떨면서, 남자 친구를 괴롭히던 생각이 나는군요. 몇년 전 그날에 영화를 보다가, 너무나 감동스러워 영화 중간에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장면에서, 그가 조는 모습을 보고, 크게 화를 냈었죠.

    어제는 기숙사에 여자 세명이 덩그란히 앉아서, 건포도를 씹으며 “우리 참 슬퍼보인다” 며 웃었어요. 한국과 달리 여기선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거든요. 허전하긴 해도, 최소한 사랑하는 사람과 바보같은 이유로 다투지 않게 되어,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 같아요.

  5.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저야말로 발렌타인하고 인연이 먼 사람이었네요. 발렌타인 무렵에는 바쁘거나, 헤어지거나, 혹은 짝사랑 중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거리가 떨어져 있곤 한 것 같아요. 결국 저에게는 영화를 보며 조는 에피소드마저 허락되지 않은 셈이네요.

    사실 발렌타인 데이에 무덤덤해진 것은 꽤나 오래전 일 같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초콜릿이 들어온다는 기쁨 빼고는 무엇하나 변하는 것이 없는 날이더라구요. 행복한 발렌타인 데이를 보내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발렌타인을 보내던 내일이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떄문이죠. 사실 이런 특성은 발렌타인 데이가 생애 유일한 날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일테지만요.

    저 역시 14일 저녁을 초콜릿에 커피를 곁들여 마시며 평화롭게 보냈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혹 누군가와 시간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을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수사 속에 숨겨진 진짜 속 마음은 허전함을 애써 부정하려는 방어 기제가 아닐까 싶어요. 겉으로는 애써 무관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이런 날 정말 싫어를 연발하는 저를 보아하니 말이예요.

    아무튼 사랑하는 사람과 바보같은 이유로 다투지 않아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음 아프지 않아서 좋았던 2월 14일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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