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문턱을 넘었다

오래 전 친구 녀석 하나는 <바람의 문턱을 넘었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다. 번잡한 일상에 치여 <바람의 문턱>이 무엇을 뜻하는지 녀석의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친구는 입대를 했고 그렇게 수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 우연히 <바람의 문턱>을 다시 떠올린 나에게 친구는 자신이 그렇게 멋진 문장을 만들어 낸 적도 있냐고 반문한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뿌듯한 표정을 짓는 친구를 보면서 녀석이 더 이상 <바람의 문턱>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람의 문턱을 넘었다>란 문장은 온전히 나 혼자 풀어야 할 숙제로 변해 버린 셈이었다.

어쩌면 <바람의 문턱을 넘었다>는 표현은 바람꽃과 관련된 단어일 수도 있다. 꽤나 먼 옛날부터 난 은비령에 등장하는 바람꽃에 대해, 혹은 그 신비에 대해 말하기를 즐겼고, 표절을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말의 뒷꼬리에는 그 사람이 바람꽃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슬며시 빼놓지 않았다. 늦은 밤 무심결에 받은 <바람의 문턱을 넘었다>는 문장 속에 새겨진 진짜 의미는 바람꽃을 얻었다는 뻐김, 아니 자신감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스물 하나, 철없는 우리의 마음으로서는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 어쩌면 <바람의 문턱>과 바람꽃은 아무런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늦은 밤 내리막길을 걸으며 단단한 땅이 아니라 허공을 걷는 듯한 바람의 지지력을 느낀 녀석은 그 감동을 <바람의 문턱을 넘었다>란 문장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녀석의 기억 속에서 완벽하게 지워진 문장의 최후로 보아 이 쪽의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 감동을 전달 받은 대상인 내가 문제로 남는다. 이런 소소한 삶의 감동을 주고 받기에는 우리는 상대의 실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바람꽃에 대한 이중의 은유가 아닌 바람에 관한 사소한 경험 따위를 문장으로 형상화 시킬 이유가 없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람 위를 걸었어>라는 구어체를 사용했을 것이다. <바람의 문턱을 넘었다>라는 선언지를 사용하는 경우란 기억의 속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 둘 다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날에는 의도적으로 바람의 골이 형성되는 그런 길을 골라 걷는다. 이제는 나의 숙제가 되어버린 <바람의 문턱을 넘었다>는 문장의 실체를 캐기 위해서다. 이어피스에서는 소니 롤린스의 색스폰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고 정강이를 스치는 바람결을 느끼려 잠시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하지만 <바람의 문턱>을 찾는 일은 그것을 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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