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날의 휴일

1.
이른 봄에 읽을 거리가 모두 도착했다. 임페리움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 버블붐과 경영의 교양을 읽는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후반편, 둠즈데이 북과 폭스 이블, 이 정도면 한동안 즐길 휴식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임페리움은 벌써 읽어버렸고,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 역시 빠른 속도로 얇아져 가고 있다. 철학사를 정리한 책도 다시 읽고, 미술사를 다시 읽으면 봄이 지나갈 것 같다. 이번 봄에는 몇년 만에 학교 축제에도 다녀올 예정이다. 늘 축제 기간이면 밀린 잠을 보충하느라 정신 없었던 과거는 이제 지울 때도 됐다.

타키투스의 연대기와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이 번역되어 나왔다. 로마 시대의 초기 황제들과 페르시아 제국의 사실상의 창건자인 키루스의 이야기는 꽤나 재미날 듯 싶다. 무엇보다 이들이 생각의 갈래만 많고, 어조는 불분명한 현대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와, 왕의 정부는 인근 도서관에 구입을 의뢰해야 겠다. 책장에 꼽아 놓기에 후자는 채통이 서지 않고, 전자는 까닭없이 두렵다. 하지만 표지에 실린 <수녀원의 정부>로 불리는 자매의 유화 한점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되었다. 앙리 4세의 영원한 연인이었던 그녀를 묘사한 유화는 신랄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하다. 이런 표지를 선택한 책이라면 지루하긴 해도 읽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호기심이다.

2.

늦은밤 의자에 멍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시간은 이미 충분히 늦었으며, 깊은 잠에 취해 있는 것이 의당 타당한 시점인데 오늘 난 쉽게 잠들기 어려울 듯 싶다. 이렇게 3월이 되었고, 긴 겨울은 끝을 맺었다. 긴 겨울 동안 내 삶을 지배하던 우울한 회색의 구름도 새로운 계절에는 모두 사라지기 바라지만 현실이 마음처럼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따스한 햇살과 화사한 꽃망울의 거름이 될 포근한 대기 정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3.
언제부터인가 내 삶은 사랑과 거리가 멀다. 때때로 사랑에 흠뻑 빠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금새 <표절>의 데스트리 흉내를 낸다. 비서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사내라고 독백하는 그처럼 나 역시 스스로의 매력을 매우 낮게 평가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꽤나 유용하다. 쉽게 상처받는 일도, 혼백을 잃을 정도로 누군가에게 매혹 당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상은 단조롭고, 반복적이지만 살아보면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어느 순간 주변의 대세가 된 이런 분위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4.
거울을 보니 몇달 사이에 훌쩍 나이 들은 얼굴이 자리하고 있다. 눈과 표정 모두 피곤에 지친 모습이다. 한동안 길고 나른한 휴식을 즐겨야 겠다. 길게 자란 수염과 머리칼도 정리하고, 옷장의 겨울옷도 정리해야 겠다. 복마전이 되어버린 책장과 책상도 정리하고, 그러다 보면 바람 시원하고, 화사하며 잔인한 4월이 올 것 같다. 그러나 4월이 되면 어느 사이에 만나기 힘든 비싼 녀석으로 자리매김한 악평을 조금씩 지워 나갈까 한다. 바쁘기 보다는 마음이 번잡해서 그랬노라고, 나이 탓인지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서 조금 벗어나 보고 싶었노라고 그렇게 변명해 봐야 겠다. 무엇보다 이번주에는 내 소중한 벗이 돌아온다. 그녀의 귀국 소식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인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도 그럴 듯. 이래서 우리는 이렇게 애타게 봄을 기다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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