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프리마투르

90년대 후반부터 서점계를 장악한 에코風의 소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매우 난감한 문제다. 뿐만 아니라 21세기 들어 주목 받기 시작한 모 지역의 에코로 불리는 일군의 작가들과 근래 들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브라운씨가 유행시킨 이 장르의 처음과 끝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이 장르는 문학성을 따지기에도 애매하다. 하지만 이런 난감함과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이 장르의 소설들은 남다른 재미를 보장한다. 한 권의 책으로, 하나의 문장으로 삶을 바꿀만한 힘은 없지만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빠지게 되는 소설. 이것이 이 장르에 속한 소설들이 지닌 독특한 매력이다.

임프리마투르 역시 이런 속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초반 전개는 느리지만 한번 탄력을 받기 시작하면 800페이지라는 두께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몇 시간 단위로 분절된 소설 속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사이에 종장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 친숙한 것들을 찾아내는 작업은 상당히 재미있다. 이 퍼즐의 핵심은 숨은 그림 찾기에 있으며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 이 장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느냐가 관건이다. 이 장르에 투자한 시간이 적지 않다면 일견 복잡해 보이는 구조도의 본질을 손쉽게 꿰뚫을 수 있으며 이 소설이 얼마나 뛰어난 재치로 쓰여진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재치이외의 다른 것을 기대한다면 임프리마투르는 높낮이가 없는 평탄한 소설임이 분명하다. 이 소설에 사용된 소재와 이야기를 지금껏 읽어온 다른 책들과 비교하는 작업은 즐겁지만 소설 자체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진다. 이야기의 주제는 모호하며, 심하게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긴 이야기를 읽었을 때 ‘왜’ 혹은 ‘그래서’라는 허무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할지도 모를 소설이다.

임프리마투르는 에코의 <전날의 섬>과 가장 닮을 꼴인 소설임과 동시에 조금은 다른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에코가 <전날의 섬>에서 경도 문제와 훗날 절대 왕정의 부와 세련미를 자랑할 앞시대의 프랑스를 다루고 있다면 임프리마투르는 종교, 경제적 혼란과 17세기 유럽의 경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소설에 쓰인 수법은 무늬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는 같은 장치를 구성한다. 로베르또가 다프네에 고립된 것처럼, 임프리마투르의 등장 인물들 역시 페스트란 이유로 사회적으로 격리된다. 이들의 모험은 제한된 구역에서 이루어지지만 회상과 대화를 통해서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다.

하지만 경도의 중요성과 다르게, 임프리마투르에서 다루어지는 궁극적인 비밀은 매우 당황스럽고, 허황의 정도가 지나치다. 그러나 <전날의 섬>의 존재하되 결코 아름답지 않은 로베르또와 다르게(하지만 그의 아버지 포초 디 산 파트리치오 델라 그리바라는 캐릭터는 정말 멋졌다. 게다가 이 소설의 영향으로 난 지금도 검투를 볼 때마다 coup de la mouette가 어떤 것일지 한참이나 생각한다), 존재하지 않되 여전히 아름답지 않은 로베르또의 분신 페란테와 다르게, 임프리마투르에 등장하는 카스트라토 사제와 난장이 사환의 콤비는 느리지만 꾸준한 속도로 마음 속에 스며든다.

물론 임프리마투르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난장이 사환은 어러 의미에서 전날의 섬의 주인공인 로베르또를 닮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베르또에 대한 독자의 거리는 카스트라토 사제가 부르는 노래만큼 절박하거나 슬프지 않다. 로베르또와 페란테의 분열은 카스트라토 사제와 그의 불행한 친구 푸케의 기구한 운명만큼은 씁쓸하지는 않다.

만약 이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지만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묶을 수 있는 주제와 제시어가 없는 탓이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잘 드러나는 법은 없지만 에코風의 소설이 지닌 공통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야기에 흘러나오는 화려한 언변과 신기한 이야기에 속아 주제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의 나열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에코풍 소설의 묘미이자 비법이며, 치명적인 단점임과 동시에 서점가를 장악한 원동력이다.
[#M_ P.S. | less.. |
책에 포함된 음악은 정말 멋지다. 누이 말에 따르면 소설보다 부록으로 딸려나온 음악 시디가 더 아름답다고 한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로 굳게 다짐한 나이지만 시디에 포함된 신비의 론도와 지금껏 존재조차 몰랐던 루이지 로시의 노래는, 낯선 샤콘느는 꽤나 멋지다. 이렇게 따지면 임프리마투르는 <전날의 섬>의 호적수이고(물론 <전날의 섬>의 기교가 약간 더 세련되다) 음악과 푸코의 추를 적당하게 섞은 소설인 <마지막 칸타타>보다는 확실히 우위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담하건데 4부작으로 예정된 이들 작가의 다음 소설들이 내 책장에 보관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 첨언을 하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왕가에 대한 독백은 상당 부분은 진실이 아니다. 번역상의 실수일지 작가의 숨겨진 의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진실이 아니다. _M#]

4 thoughts on “임프리마투르”

  1. 서점에 처음 책이 들어왔을 때 정말 설레더군요. 역사소설과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정말 반갑고 경사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두께가 너무 두꺼워 선뜻 읽을 엄두를 못내고, 책에 대한 리뷰만 꾸준히 읽고 있는 정도입니다. CD도 들어있던데 괜찮다니 더 기대가 되네요. 가격이 좀 부담이 되긴하지만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2. 처음에도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이내 두께의 압박과 부록 시디때문에 선뜻 손에 잡기가 어렵더군요. 그런데 소설을 다 읽은 지금에는 매우 만족스러워요. 소설을 읽는 동안 론도에 흠뻑 빠지기도 했구요. 대단한 클라이막스는 없지만 속도감이 받쳐주는 소설이라 두께의 부담은 안가지셔도 될 거예요.

  3. 헤헤, 트랙백 타고 들어왔습니다. 🙂
    전날의섬은 에코의 다른 작품에 비해 호평이 많지 않아서 후순위로 미루고 있었는데 임프리마루트와 비교하신 서평을 읽어보니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4. 개인적으로는 전날의 섬이 바우돌리노보다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에 비해서는 확실히 열위에 있긴 합니다만 에코風의 다른 소설에 비하면 확실히 재미있는 소설이지요.

    임프리마투르와 전날의 섬을 읽다보면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하시게 될 거예요. 어쩌면 모사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비슷한 인물과 설정이 살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소설 속에 내재된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닌 것이 매우 신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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