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때때로 기억은 삶을 거칠게 습격한다. 잠시 정신의 여유가 생기자 마자 거칠게 삶을 공격하기 시작한 과거의 기억은 무겁고, 둔중하며, 떼어내기 어렵다. 이 땅 어딘가에서 숨을 쉬고 하루를 살아갈 실존하는 환영이 주변을 걸어 다닌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며, 그들의 생각과 표정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 피곤한 눈을 감는 것도 쉽지 않다. 눈을 감으면 기억은 한층 뚜렷한 형태로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빈곤한 문학적 상상력 밖에는 가지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몇 줄의 문장으로 많은 것을 추리해 내는 내가 보인다. 문장의 어미 변화를 주의 깊게 음미하고, 익숙한 상황을 포착해낸다. 다른 순간은 몰라도 이 순간 내 예측은 좀처럼 틀리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런 예측이 가장 나쁜 기대를 토대로 하는 만큼 예측이 맞아 들어간다고 기쁜 것은 아니다.

가령 어제 있었던 WC군과의 전화가 그렇다. 담담한 흉내를 내는 어조 속에는 아직도 꽤나 많은 미련이 녹아 있다. 녀석이 말하는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신이 보이곤 한다. 말은 실체를 만들어내고, 난 실체이면서 환영인 모호한 공간 속의 관찰자가 된다. 하지만 이내 관찰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방관자가 되어도,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은 무겁게 내려 앉는다. 두 발을 디딘 대지가 사라졌을 때의 느낌, 허공을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공포가 내 마음을 사로 잡는다. 공포가 거세질 수록 사랑은 병이고 집착이라는 말에 더욱 깊게 빠져든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횡단 보도의 진행표시등을 기다릴 때마다 난 습관처럼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횡단 보도를 건너는 와중에 생각이 바뀐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괴롭고, 애써 누군가를 사랑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자문해 본다. 하지만 횡단 보도의 끝에 다다랐을 때 생각은 또 한번 변한다. 사랑은 지속 가능한 사고가 아니라 단순한 화학 반응에 불과하다고, 사랑은 영혼사이의 숭고한 관계라기보다는 계약의 속성을 지니는 경우가 더 많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사람이 숭고한 영혼의 교류가 아니라면 협상의 기술을 갖추고 맞설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다. 이어폰은 달콤한 음악을 토해내고 이내 또 다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나를 발견한다. 다음 횡단 보도가 나타날 때까지 난 그렇게 누군가를 흠모한다. 결코 변하는 법이 없는 지겨운 패턴을 반복하면서 난 그렇게 복잡한 마음의 쳇바퀴를 돈다. 아무런 기쁨도 되지 않는 무의미한 생각들이 길에 버려진다. 길에 버려지는 생각만큼 난 나이를 먹어간다. 기회는 점점 멀어지고, 그렇게 사랑 또한 멀어진다.

P.S.
그런데 왜 횡단 보도는 종단 보도가 아닐까? 건널목의 진행 방향은 분명 횡단이 아니라 종단일 텐데. 역시 운전을 하지 않는 보행자의 사고 방식이란 단선적이다.

2 thoughts on “감정의 혼란”

  1. 어제는 우리과에서 가장 귀엽고 가장 어린 친구가 사랑에 빠졌다는 메일을 받았어요. “언니 계속 생각나는거 있죠.” 예전에 저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 친구에게는 첫 사랑이거든요. 어제 채팅한 친구들의 말로는 그 친구가 점점 예뻐져간다더군요.

    혼자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저녁 빛이 좋거나, 커피향이 좋을때, 팻 메트니의 음악을 들을땐.. 저 역시 누군가를 그리워해요. 그리곤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기 항상 기대하죠..

    웃긴 얘기 하나 할까요? 웃지 마세요.. 저번 주에 찬익씨와 채팅을 하고, 그 다음 날 수업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저 보고 왜 행복해 보이냐는 거예요. 하하하… 찬익씨의 황당해 하는 모습이 눈이 선하군요.

    What the heck!
    This is the thing I want to tell you. I think I like you. I think I finally found somebody I could talk to. Why don’t we love? Just miss me if you want to miss somebody. I guess I sound crazy.

    say No! 해도 괜찮아요. 찬익씨 말대로, 저는 지금 기회인 것 같았고, 그저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고… 저야 말로, 기회도 멀어지고, 사랑도 멀어져가고 있거든요. 하하하..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 굉장히 기분 나쁘거나 사생활 침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갖고 있는 찬익씨에 대한 느낌은… 그냥… 웃어넘길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러니… 하하하… don’t feel une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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