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메모

[미래의 내자께]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열여덟의 메모를 발견했다. 안사람이라는 표현. 요즘 들어서는 직접 부르는 이름이나 wife가 대체 해버린 아내를 지칭하는 또 다른 단어를 보면서 묘한 향수를 느꼈다. 뜻이나 단어의 형성과정에 눈을 감는다면 아내의 변형인 이 단어의 울림은 매우 특별하다. 이제는 내자라는 단어만으로도 꽉 막힌, 제대로 배우지 못한, 덜 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난 어느 이름모를 책에서 읽은 ‘내 내자일세’라는 문장의 울림을 기억한다. 철없던 아주 먼 옛날 그 문장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소년 시절의 풋사랑은 지금 생각하기에는 무척이나 단순한 것이어서 사랑과 결혼을 동일시 한다. 당시의 나도 그랬다. 사랑한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신성하지만 일견 HR에나 어울릴 신념으로 달아올랐던 당시의 내 생각은 지금에 와서는 꽤나 귀엽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데 결혼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라고 <좁은 문>을 읽으며 안타까워 했던 소년이 그간의 시간동안 얼마나 끔찍하게 변했는지는 차제하고 말이다.

사실 이 메모에는 지금 쓰라고 해도 쓸 수 없는 간결하고, 호소력 있는 진실이 듬뿍 담겨져 있다, 열여덟 총각같은 목소리로 조금 더 사랑해주지 못했음을, 처음 그 마음을 지켜내지 못했음을 [미래의 내자]께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있다. 오늘의 나답지 않은 수줍음이 가슴을 내리친다. 지금의 나라면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진솔한 관념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18살 가을. 노을이 예쁜 어느 저녁에 지금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고백하고, 그 고민이 먼 미래에는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묻는 18살의 그 메모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과 달랐다는 의미의 한숨이 흘러 나온다. 당시의 내가 고민했던 문제의 답을 알고 있는 현재의 나로서도, 당시의 내가 궁금했던 그 무엇의 길을 걷고 있음에도…

메모를 책 속에 끼워 놓으며 그에 비견되는 25살의 메모를 써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시대와 의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만큼 [미래의 내자께]로 시작하는 메모는 아닐 테지만 경험과 생각이 더 넓어진 스물 다섯의 청년이 열 여덟의 소년에게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령 진다 하더라도 기권패를 당하는 것보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모든 것 거는 것이 낫다. 어차피 이 메모를 볼 사람은 내가 아니면 [미래의 내자]이거나 먼 훗날의 장성한 자녀들일테니까. 조금은 부끄러운 말을, 약간은 솔직한 말을 써도 오늘의 나를 탓할 사람은 없다. 열여덟의 메모를 발견한 내가 과거의 소년을 타박하지 않았던 것처럼.

2 thoughts on “열여덟의 메모”

  1. 그 아이들의 고모가 메모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메모에 고모의 위트있는 추신이 더 해질지도….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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