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일인자

주변의 억측과는 달리 난 통속적 역사 소설을 좋아한다. 근래의 도서구매 리스트에서 이런 소설을 발견하기란 꽤나 힘든 일이지만 그것은 좋아하는 만큼 그 기준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커피와 홍차가 더 이상 수면과 집중력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처럼 평범한 역사 소설은 더 이상 나의 흥미를 돋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역사 소설은 이제는 좀처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특이한 소설이거나 절판 되었거나, 혹은 반값에 사들일 수 있는 것들이 되곤 한다.

아! 또 한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하나같이 표지가 조미료로 범벅이 되어버린 국처럼 느끼하다. 하지만 표지만으로 책장에 담긴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표지와 내용이 따로 노는 책들의 역사는 책이 인류의 손에 존재하는 한 절대 끝나지 않을 역사이기 때문이다.

The Tepidarium(1853) Theodore Chasseriau, Musee d'Orsay
이런 특징을 지닌 통속적 역사 소설가운데 내가 가장 잘된 것으로 꼽는 것은 <가시나무새>의 작가 콜린 맥컬로우가 쓴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 First Man ROME )이다.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마리우스 시대를 다룬 <로마의 일인자>와 술라 시대의 초반부를 다룬 <풀잎관>만 번역이 되었는데 두 책 모두 신간으로는 구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시리즈가 의도한 카이사르를 다룬 부분은 아직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통속적 역사 소설의 본령이 무엇인지 맛보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93년에 처음 손을 댄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 것은 2000년 이였고 풍관은 좋지만 책 썩는 냄새와 곰팡이 냄새로 가득찬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던 때였던 것 같다. 당시의 난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소녀들에서 뛰쳐 나온 듯한 한 여자의 뒷모습에 끌려 그 도서관을 애용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읽는 동안 난 아무의 손도 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던 이 시리즈를 찾아 내었다. 그리고 그녀가 도서관에서 사라진지도 모른 채 콜린 맥콜로우가 안내하는 기원전 2세기 말엽의 로마로 여행에 흠뻑 매료되었다.

사실 이 소설을 가장 잘 묘사하는 말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정사이던 야사이던 실제로 언급이 남아 있는 인물이며 인물간의 관계가 역사적 맥락과 기묘할 정도로 잘 맞아 떨어진다. 로마의 일인자 1권에 등장하는 그리스인 창녀와 술라의 의붓어머니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술라를 돌봐준 그리스인 창녀로 역사에 기록된 그들이며 이들을 살해하는 술라의 굴절된 욕망은 너무나 생생하고 손에 잡힐 듯 뚜렷하다. 그뿐만 아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여자 흉내쟁이인 메트로비우스는 이미 전성기가 지났지만(이 문장은 사실은 꽤나 노골적이다) 술라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고 항상 주장했다] 라고 기록된 술라의 파트너 메트로비우스는 매우 예쁘장한 소년으로 등장하다.

유구르타 전쟁은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카이사르가와 마리우스의 연결 또한 기가 막힐 정도로 깔끔하다. 훗날 술라의 군단을 인솔하려 갔다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루푸스는 카이사르가의 둘째 도령 가이우스와 아우렐리아를 맺어주는 붙임성 많은 중매쟁이 역할을 맡는다. 사실 이 정도 생동감이면 실제로 있을 법한 사실로 믿어도 부족함이 없다. 동맹시 전쟁을 앞둔 시기에 벌어지는 아우렐리아와 술라의 미묘한 감정 교류도 일품이었고, 묘사의 유려함과 캐릭터의 현실감이 뛰어났다. 장편 소설인 만큼 후반 서술이 조금 지리하기도 하지만 이 정도야 장편 소설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 밖에 없는 핸디캡쯤으로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사실 내가 通俗小說이라 부르며 좀처럼 읽은 표를 내지 않는 소설가운데 이 소설만큼 재미났던 소설은 없었던 듯 싶다. 책이 처음 출간된 90년대 기준으로는 확실히 좀 야했고(음 지금 기준으로도 야하다. 다만 그 야함이 너무나 담담하게 서술되어서 처음 읽었던 당시에는 그것이 야한지도 몰랐다) 필치는 섬세했으며, 개인적으로 <욕망의 마녀>라 별명지은 그녀답게 욕망과 야망, 쾌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 시키는 수법이 빼어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요즘에 와서는 <가시나무새>를 읽은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다. <가시나무새>의 작가가 쓴 공화정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란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을 찾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며, 더욱이 이 책은 헌책방에서조차 완질을 구하기 어렵다. 혹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서관에 갔다가 바람을 맞았을 경우 상대를 용서하기 위한 마음을 핑계 삼아 읽기 좋은 책.

[#M_ P.S. | less.. | 사실 원래 이 글의 목적은 로스 레키의 카르타고 시리즈에 대한 서평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로마의 일인자가 생각났고 글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아무래도 내가 읽은 로마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통속적 역사 소설가운데 가장 잘된 소설이라고 생각되는 세개의 시리즈(로마의 일인자, 불의 문, 카르타고 3부작)를 소개하는 글이 굴비 두름 마냥 엮어지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지고 있던 로마의 일인자는 1권은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잊어버렸으며, 나머지 권들은 이사 중에 분실한 수많은 통속 소설의 일원이 된 듯 싶다. 결국 현재로서는 이 책의 표지를 스캐닝할 방법이 없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난 술라가 그리스인 동거인을 교외로 불러내 독살하는 장면에서 <얼 재미있는 걸>이란 혼잣말을 연발하다가 화장실에 갔다. 다녀온 뒤로 내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읽고 있던 한 여자아이는 그 뒤로 다시는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아이가 로마의 일인자 아래에 놓여 있었던 삽화가 드문드문 등장하는 버튼판 아라비안 나이트를 미쳐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_M#]

6 thoughts on “로마의 일인자”

  1. …흑 보라고 유혹하시는 거 맞죠? 시험 끝내고 가벼운 소설이나 읽으려고 책 빌려왔는데 레포트 쓰려다 블로그 한바퀴 돌다가 이런 포스팅을 보다니 ㅠㅠ 이러면 또 책을 안찾아 볼수가 없잖아요 =_=; 사실 로마인이야기도 아직 안읽어서(읽기가 싫기도하고;) 고민중인데.. (언제나 좋은정보만 잔뜩 가져가는 듯 하네요 ‘ㅂ’)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중도관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목이 칼칼해지며 감기가 몰려왔어요. 정말 사람은 긴장이 풀리면 안되나봐요;;

  2. 유혹을 한다면 이 정도는 써놓아야 유혹이죠
    청구기호(823.9 M133 로 1.1) 폐가실에 있는 것이나 어문학실에 있는 것이나 전부 대출가능이네요^^

    거의 소설화 되다시피한 시노오의 것보다는 진짜 소설인 이 책이 휠씬 재미있다는 것에 커피 한잔 걸 용의가 있어요.

  3. 세상에, 세상에.. 이 책을 읽으신 분을 너무 오랜만에 만나요. ㅠ.ㅠ
    지금은 절판되어서 도무지 구할 수 없는 전설의 책….
    헌책방에서나 만날 수 있는 책…

    첫 시작인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만나는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죽은 암소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술라까지.
    율리아와 율릴라도 좋아하고.
    열거하다 보니 끝없이 흥분하게 되네요!
    너무나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지만 참 잘 쓴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해요.

  4. 93년에 출판되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비극이었죠. 만약 근래에 이 소설이 출간되었더라면 꽤나 유명세를 탔을 텐데 말이죠.

    전 유명한 카이사르의 할아버지 되는 그 캐릭터의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어요. 가부장적이면서도 끝내 율릴라에게 무릎꿇는 모습이며, <자의적인 죽음>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이며, 하지만 압권은 술라의 완전 범죄였죠. 마리우스가 그의 노새들을 편성하면서 한 연설도 흥미로왔구요. 아우렐리아의 인술라에 대한 묘사도 다정다감했죠. 저도 열거하도 보니 끝없이 흥분하게 되네요. 읽은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나는 소설은 드문 법인데 이 소설은 뇌리에 각인되는 무엇이 있는 듯 싶어요.

  5. 빌려온 책들을 재빨리 읽고 로마의 일인자 읽기 시작했는데요 재밌네요 ^-^ 묘사가 자세한게.. 꼭 옆에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좋아요. 이제 1권을 다 본것 뿐이지만요.. 1권에서는 마리우스와 카이사르의 저녁식사가 상당히 인상깊었어요. 분위기가 참.. 오늘 2권더 빌려갈 생각인데 이번주에 발표도 있고 고시실 시험도 있는데 왠지 다 읽어버릴 분위기네요. 맛있는걸수록 아껴먹어야 하건만 급한 성격은 기다려 주질 않네요. 덕분에 정말 재미있는 소설 하나 읽어요. 감사 감사.

  6. 시험이 끝난 첫주로서는 매우 이른 시간에 중도관에 계신 것 같아요. 사실 아이피의 앞 세자리가 도서관 것 같아 지레 짐작해봤답니다.^^

    발표에 입실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절대 풀잎관까지는 대출하시지 않기를 권해 드려요. 로마의 일인자의 경우에는 속도감이 있어서 장이 훌쩍 넘어가는데 풀입관의 경우에는 속도가 조금 안나는 편이거든요. 어차피 손에 잡았다면 최대한 빨리 읽는 것이 지지 부진 슬쩍 슬쩍 페이지를 넘기는 것보다는 시간 낭비가 덜 할 것 같아요. 그럼 입실 시험 잘 보시기를 빌어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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