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과거 혹은 그의 과거

친구 모군의 미니홈피에서 SJ란 이니셜을 발견하고는 ‘녀석하고’ 피식 웃어 버렸다. 굳이 내용을 보지 않아도 이니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SJ의 사진을 꼼꼼하게 구경한 나는 방명록에 녀석의 배신행위를 규탄했다. 하지만 규탄은 규탄이고 규탄을 끝낸 바로 아래에는 사진의 출처를 고지하라는 문장을 덧붙였다. 녀석이나 나나 이 나이를 먹도록 너무 변한 것이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변했지만 우리의 취향만큼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의 우상은 금발의 아름다운 여배우들이었다. 한번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우리가 한물 간 타란티노의 [Kill Bill]를 봤던 이유가 그의 기발함에 열광해서가 아니라 우마 셔먼을 보기 위해서 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배트맨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볼 것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도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

십대 후반.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이 개봉했을 때 우리는 카메론 디아즈가 조연이란 이유로 그 영화를 봤고, 우리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되뇌면서도 [섹시 블루]를 보았으며,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같은 이유에서 [킬링 미네소타]를 봤음이 틀림없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녀석의 스토커가 틀림없다. 녀석의 문장에 담긴 내력을 알아보고 웃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녀석의 Skia style에 가까운 흘림체의 원형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녀석의 독특한 서체를 흠모하는 아가씨의 댓글에 웃음을 터트린다. 16살 모의고사 시험지에서 충격적으로 변한 녀석의 서체를 발견하고는 글씨가 오리같다고 생각하며 웃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초콜릿 두개를 가지고 찾아가 시험 걱정따위는 안하고 정신없이 농구를 하던 때가 있었는데 내기 농구 후에 마시던 코크의 강렬함이 좋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우리가 안지 열 일곱해가 흘렀고 스물 다섯 먹은 청년이 되어버렸다. 비틀즈를 듣고 브리티쉬 락에 빠져 있던 그 시기 어머님이 해주시던 찹쌀전병은 왜 그리 맛있었는지…

일을 파하고 귀가하는 길에 오랜만에 헌책방에 들렸다. 그리고 SJ의 사진을 찾아 과월호 에스콰이어紙를 꼼꼼하게 뒤졌다. 아쉽게도 그녀의 사진은 깨끗하게 절단된 다음이었고 난 허탈하게 웃으며 헌책방 아주머니에게 몇해 전 했던 부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 남긴 것은 집전화였고, 이번에는 핸드폰 번호라는 차이점 하나뿐이다. 시간은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흐르는 모양이다.
[#M_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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