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산사를 동경하는 C군에게

사대 뒷편 벤치에 앉아 하루의 고단함과 인간 관계의 서먹함을 토로하던 그 때의 우리는 늘 산사의 한가로움을 동경했었지. 어떤 의무나 당위성에 존속되지 않은 채 향유하는 은일한 낙자의 삶을 어떤 이상처럼 여겼던 것 같아. 마음껏 책을 읽고,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그런 삶. 종교적 열정이 아닌 무한한 정신적 자유에 대한 열정이 우리가 그토록 위험천만한 꿈을 꾸도록 만들었지.

2003년 가을 난 우연히 그렇게 우리가 동경하는 산사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 같아. 한달 가까이 집을 떠난 적이 없었지. 하지만 어떤 의무도 당위성도 구속도 없었던 그 시간동안 내가 느꼈던 것은 은둔의 즐거움이 아니라 격리된 수용소 군도의 죄수로서의 삶이었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창 밖을 보면서 이프성에 갇힌 에드몽 당테스의 기분을 맛보았지. 격렬하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바다를 보았고, 물 속에서 걸어 나오는 여인의 형체를 보았으며, 유리창을 딛고 있는 내 팔이 그대로 빨려갈 듯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어. 그 이후의 난 꽤나 오랫동안 산사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지 않았던 듯 싶어. 그것이 매우 견디기 힘든 일임을 깨닫게 되었거든.

헤세의 단편 소설가운데 ‘성자와 빵’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어. 성자에 가까운 고행을 하던 은자를 귀히 여긴 신이 그에게 빵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 빵으로 인해 성자가 타락하고 마는 내용의 소설이었지. 물론 그답게, 혹은 우화답게 교훈적이고 우아한 결론으로 마무리를 짓지만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고즈넉한 산사의 삶에도 유혹은 존재한다는 사실이지. 기실 고즈넉한 은자의 삶이나 우리가 번잡하다고 정의하는 일상이나 유혹의 농도와 삶의 다사다난함을 똑같을 것 같아. 그러니 우리가 꾸었던 꿈은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이자 무의미한 동경일지도 모르겠어.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어제의 대화를 통해서 나나 자네나 마음 속으로 은밀하게 고즈넉한 산사의 삶을 또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야. 말로는 자네의 위험성에 대해 논박했지만 기실 더욱 위험한 것은 나였어. 자네에게 존재하는 현실적 제약이 지금의 나한테는 없었거든.

밤새 뒤척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어. 그러다 보니 고즈넉한 산사에는 이미 중독을 한참 넘겨버린 인터넷도 존재하지 않고, 지인들의 육성을 전해줄 핸드폰도, 일상에 유쾌함을 더해줄 Spot이 존재하지 않더군. 형이하의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형이상의 추구가 이미 현실에서는 유용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어. 굳이 사변의 단계에 접근하지 않아도 TOC가 여기에도 적용되더군. 형이하는 형이상의 제약 요건이었어. 그러니 일단은 형이하에 집중하자구, 고즈넉한 산사나 거칠고 번잡한 일상이나 같은 위험도를 지닌다면 이왕이면 형이하의 즐거움이 널려 있는 일상을 택하는 것이 옳은 결정이겠지?

P.S. 형이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요량이면 넌센스인것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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