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ty Room

퇴근 후 집까지 걸어오면서 지난 일요일 아침에 느꼈던 공허함의 정체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사실 휴무일인 토요일에 난 덤이 되어 친구의 물류센터 견학에 따라갔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말동무 하나 없는 지리한 이 생활에 젖어있던 나에게 누구와도 바꾸지 않을 모군과의 드라이브는 유쾌했고, 내가 작고 어여쁜 벗이라 핸드폰에만 살짝 적어놓은 친구를 만났기에 더욱 행복했다. 물론 말로만 듣던 다양한 방식의 분류 작업과 섬세한 매뉴얼을 눈으로 확인하는 재미도 솔찬했다.

견학이 끝난 뒤로는 나른하게 앉아 식사를 했고, 영화를 보았으며, 역사 앞 벤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8시 58분 기차는 정시에 출발했고 기차 안에서 난 Aria da Capo를 들으며 수첩에 메모를 휘갈겼다. 집에 도착하니 10시 25분이었다. 뻐근한 양팔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며 샤워를 했고 11시 부터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12시 반에 잠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7시 25분에 눈을 떴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감이 가슴뼈에서 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 말려진 머리칼에서는 기분 좋은 향이 나고 있었고, 샤워를 하고 바로 잠든 몸에서 밴 비누 냄새가 이불을 뒤덥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허전했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밝고 경쾌했으며 바람은 시원했다. 이런 아침에 심장 끝에서 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공허함이라니? 공허함을 지우려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가슴 한구석이 뚫린 듯 맑고 차가운 바람이 폐부를 훑고 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공허감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매우 오랜만에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눈뜨는 아침을 맞았다는 것. 그 순간 홀로 잠에서 깨어난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축제가 끝났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며 방안 깊숙이 들어온 햇살에 눈을 떴던 그 날의 기분이 다시 전해져 왔다. 종류는 다르지만 토요일 오후 난 비슷한 직감을 받았던 것 같다. 축제가 끝난 것뿐만 아니라 다시 떠올릴 수도, 시작할 수도 없는 강 저편의 무엇이 되었음을 말이다. 그래서 가슴 속이 텅빈 것처럼 공허하고 외로웠다. 모든 것들을 과거와의 연장선상이 아닌 새로운 시작점에서 부터 새로 그려야 한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시간의 벽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내 기억과 반응은 23살에 멈추어 있는데 지인들은 나이를 먹었고, 나에게는 여전히 현재인 23살을 진작에 뛰어넘었다. 그들은 새로운 위기와 도전을 맞았으며 그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무지에 대한 자각과 변화의 거센 폭풍우는 소름 돋도록 낯설었다. 내가 엉뚱한 추측을 하고 있음을 인정한 순간이 뱃속이 텅비며 Empty Room의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허함은 까닭없이 찾아왔다가 인식하지 못한 순간 떠나간다. 공허함을 가장 빨리 내치는 법은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고, 짧고 손쉬운 목표를 지속적으로 시야에 내놓는 것뿐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두 방법 모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급작스럽게 공허함은 사라졌으며 마음은 걸음이 처음 머물던 그곳으로 돌아갔다. 이래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 어느 눈 먼 시인이 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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