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내가 소유한 수많은 책가운데 허리가 부러질 위기에 처한 책은 게팅 메일리의 ‘아르마다’와 츠바이크의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뿐이다. 전자는 막내 누이와의 7년간에 걸친 사투로 허리가 부러졌고, 후자는 손 때에 책허리가 부셔질 듯 팔랑 거린다. 유난히 책을 깔끔하게 보는 나로서는 이 정도면 예외 중의 예외다. 하지만 내 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넘나들은 이 책의 화려한 역사를 놓고 보면 그리 무리도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편벽한 습성을 지녔던 난 주변의 지인들이 삶의 전환기에 놓여 있거나, 시련을 당했을 때, 혹은 쇼크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면 주저없이 이 책을 빌려주곤 했다. 심성이 고운 이들은 이책에 상처를 받고 나와 멀어졌고, 냉엄한 이들은 열광했으며, 중간에 속한 이들은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현명한 처사를 보여주었다. 난 멀어지는 이들을 붙잡기 위해 ‘편지’나 ‘감정의 혼란’ 같은 아름답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그의 단편을 권했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마젤란’과 ‘메리 스튜어트’를 권했다. 그리고 열광한 이들에게는 따로 할 일이 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탐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츠바이크의 모든 것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은 프랑스 혁명기로부터 부르봉 왕가의 복귀 때까지 ‘살아 남은’ 인물인 조세프 푸세의 전기 소설이다. 사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겨우 세계사 시간에나 간략하게 배우고 넘어가는 우리로서는 로베스피에로의 공포 정치 이상을 알기 어렵다. 사자 머리 당통과 내가 좋아하는 까미유 데뮬랭 부부, 샤를로트 코데에게 암살당한 마라조차도 우리에게는 너무 낯선 인물들이다. 하물며 프랑스 혁명을 다룬 대개의 모든 역사서에서 변절자로 취급받은 푸세를 아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조금 엄격하게 말하자면 탁월한 전기 작가로 알려진 츠바이크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푸세의 가엾은 영혼은 햄릿에게 나타나 복수를 원하는 선왕의 유령처럼 불우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소설은 푸세의 삶을 배를 못타는 어부의 아들에서부터, 수도원 학교의 물리 선생, 국민 의회 의원, 급진주의 산악당파, 좌파 테러리스트, 리옹의 산탄난사자, 돼지 먹이치기, 밀정, 통령정부의 경찰 총감, 나폴레옹 휘하의 2인자, 황제의 부재중 섭정, 프랑스 제1의 갑부, 오트란토 공작, 그리고 불우한 망명객으로 나누어 조망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우리는 놀랄만큼 차가우면서도 명철하며 단호한 피를 가진 이 남자의 놀라운 힘에 매료당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악마같은 음모에 대한 탐식과 정치적 술책에 놀라면서도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다정함과 자상함에 빠져들게 된다.

재빠른 변신과 아연한 배반은 푸세의 전매 특허이며 항상 다수가 자기가 있을 곳 이라는 그의 행동 지침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도저히 밉지가 않다. 순결한 척하는 신전 무녀들의 허위와 위선에 지친 나로서는 되려 경악과 아연실색이라는 말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배신이 되려 더욱 순수해 보인다. 누가 그랬던가? 명쾌한 배신은 어설픈 충성보다 더 나은 법이라고…

만약 나에게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글럽덥드립의 총독처럼 죽은 이들의 시종으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푸세에게 꼭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나, 헤센의 급사가 등장하기 반세기 앞서 리옹의 훈령을 통해 완전한 사유 재산의 철폐를 주장한 그가 무엇을 보았기에 통령 정부 시대에는 치부를 하고, 황제정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배금주의 시대에는 프랑스 제1의 갑부가 된 기막힌 변절을 했는지, 돼지 먹이 치기를 하며 빈곤의 유형지를 방황하던 그가 발견한 ‘황금’은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역사는 프랑스 혁명의 주인공으로 로베스피에르를 선택했다. 신고전주의의 대가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통해 비운에 사라진 그의 생명을 이상적인 초상으로 남겼고, 극작가들은 ‘당통’을 통해 열혈의 웅변가의 삶을 문학으로 남겼다. 데뮬랭의 신문은 박물관에 남았으며, 그의 열정과 사랑은 호의적인 평판으로 남았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회상록을 남겼고, 탈테랑은 ‘가정 교육이 덜 되었다’라는 한 마디로 나폴레옹을 질타한 호기와 우아한 외교관으로서의 명성을, 시에예스는 그의 달변과 법학관으로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힙겹게 만든다. 그렇다면 만인에게 변절자와 비겁한 모리배로 손가락질 받은 푸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에게 남은 것은 뛰어난 전기 작가로 불린 츠바이크 남긴 한편의 전기 소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어떤 초상보다 난 이 초상이 제일 마음에 든다.

[#M_ P.S. | less.. |지음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친구 모군은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에 열광한다. 사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그가 어떤 경로로 츠바이크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책장에 꼽혀 있는 것을 보고 사게 된 것인지, 아니면 사대 뒷편 벤치에 앉아 늘어놓곤 했던 장광설에 흥미를 느끼고 읽게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부터 그의 책장에 꼽혀 있었는지 오늘의 나로서는 확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가 이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지만 않았다면 지금 이순간 ‘어느 정치적 인간 초상’을 꺼내 들고 있으리라는 점만큼은 확언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이 원하는 구원을 이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으리라 믿고 있을테니 말이다. _M#]

6 thoughts on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1.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요셉 푸우쉐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랍니다. 한 때는 문장(그래봤자 한국어지만)을 달달 외울 정도였는데. 여기서 리뷰를 보니 반갑네요.

  2. 이건 비밀글인데…
    하이얌님 남자분이신가요? 그렇다면 주소 알려드리기가 살짝 민망한데요…
    말 그대로 슬래쉬 같은 걸 휘갈길 생각이라서요. 물론 썰렁한 개그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보고 괜히 기분 나쁘실 수도 있으니까요. (^^;;;;)
    우선은 보류하겠습니다. 에휴 뭐 대단한 것 숨기는 것 같네요. 전혀 아닌데.

  3. 어느 ‘모군’이 날 칭하는 것이라면 대답해 주겠어요.
    우선 츠바이크를 내가 접하게 된 것은 ‘발자크’에 대한 전기에서 였네.
    사실 그 책은 앞부분이 너무 지루해서 띄엄띄엄 읽고 있었는데,
    자네의 츠바이크에 대한 평가가 워낙 강렬해서 ‘발자크’를 읽은 후
    ‘푸셰’를 읽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네.

    뭐,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잘 기억이 안 나.ㅋㅋ

  4. //kyle
    저도 제일 좋아하는 책가운데 하나예요. 게다가 이상스럽게 외우기 좋은 문단도 많구요. 저 역시 예전에는 달달 외울 정도였답니다.

    //비밀댓글
    살짝 민망하시다면야 제가 멈추어야 겠네요. 덧글을 보고 한층 더 큰 호기심이 생겼지만 더 이상은 비례가 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wc
    방학하니 좋더냐? 계절학기는 언제부터 시작인가? 그런데 ‘어요’는 왠지 안어울린다네. 편하게 편하게. 일요일까지 체력비축은 충분히 해놓도록.

    지금 수염을 정말 멋지게 길렀는데 보여주지 못해서 아쉽구먼 풍성한데다가 햇살에 반짝이는 것이 매우 느낌이 좋아. 물론 내 느낌과 반대로 보는 사람은 아찔하겠지만 말이야.

  5. 다비드 변절 검색하다 들어왔는데 좋은 리뷰네요..
    좋은 리뷰 좀 담아가겠습니다..음..
    원치 않으시다면 댓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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