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성장과 함께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질문이 있다면 능률적이고 온건한 독재정과 무능하고 부패한 민주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한 정체냐는 질문이었다. 현실의 난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던 만큼 역사 속에 등장하는 능력 있고, 공명정대한 참주들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졌던 균형추를 다시 중심으로 돌려 놓았다.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고귀한 자유 정신이 말살되는 과정을, 혹은 자유시민이 노예의 굴종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사실 연대기를 읽기 전까지의 나는 타키투스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문체라는 설명에 코웃음을 치곤 했다. 로마의 황금기를 살다간 그가 염세적이라면 그것은 다분히 배부른 투정에 불과할 것이고, 그의 비관적인 문체는 지식인들이 쉽게 빠지곤 하는 매너리즘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단테 신곡의 지옥편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인간성의 상실과 추악한 음모. 경멸 받아 마땅한 온갖 인간 군상을 바라보면서 종국에는 타키투스가 주장한 ‘고귀한 자유 정신의 실종이 수많은 시민들을 비굴한 노예로 만들었다’라는 문장에 동의하게 만든다. 사형과 추방, 유혈과 탐욕 속에서 영웅의 이미지를, 존경 받아 마땅한 인물을 찾기란 너무 요원한 일이다.

사실 처음 책장을 열었을 때 티베리우스를 잔인한 변태 노인쯤으로 서술한 타키투스의 시선에는 많은 편견이 녹아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네로로 끝나는 클라디우스-도미티우스 왕조의 기록을 읽은 지금에는 와서는 타키투스가 옳았다고 믿게 된다. 비록 현실의 티베리우스가, 혹은 클라디우스가, 혹은 네로가, 타키투스가 서술한 만큼 잔인하고 음험한 인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은 분명 자유 정신의 급격한 쇠락을 묵인하거나 조장했고, 이것은 비겁하고, 비열하며, 비천한 노예들의 사회를 낳았다. 결론적으로 제국이 낳은 것은 허울 좋은 부와, 삶의 이유를 잃은 다수의 소외된 군중뿐이다.

독재의 부당함에 항거하고 이를 비판한 책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지금껏 내가 읽어온 어떤 책도 타키투스만큼 몸서리치도록 정신적 압제가 낳은 병폐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 책은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타키투스가 지닌 미덕이며, 그의 저술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아닌가 싶다. 물론 두 번 읽으라면 고개를 흔들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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