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세계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광화문에서 대림미술관까지 걸었다. 여름을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워하는 지기와 함께 였더라면 햇살이 내리쬐는 지상이 두려워 지하세계를 활용하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소소하게 웃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햇살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뫼르소의 살인을 이해하게 만들었던 햇살에 대한 증오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또 다시 웃었다. 그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

보드리야르의 사진은 시뮬라시옹의 저자답게 꽤나 다양한 지적 유희를 제공한다. 이미지를 순수하게 ‘이미지’로 느껴보라는 당부와 다르게 그가 찍은 사진은 이미지를 둘러쌓고 있는 배경 혹은 보이지 않은 세계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보이지 않기에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는 사진 속의 시선을 찾아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게 만든다. 벽 속에 문이 있고, 사진 속에 마침표가 찍어져 있으며, 텅 빈 의자에서 누군가의 굳건한 등을 발견하며, 종국에는 모든 시선과 존재와 부존재가 시뮬라시옹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사진은 두가지 층위로 나뉜다. 하나는 표제와 이미지 사이에 존재하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이고, 다른 또 하나의 층위는 이미지와 그 해석 사이에 존재하는 기표와 기의가 시뮬라크르 된 상황이다. 물론 그의 시뮬라시옹 이론에 따르자면 기표와 기의 사이에 규범적인 당위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기호학적 해석을 토대로 훈련받은 두뇌는 기표와 기의사이에서 일어나는 불일치를 분명하게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의를 가장 잘 표상하고 있는 기표를 상상하게 된다. 그리곤 이내 보드리야르가 언급한 기표와 머리속에서 상상한 기표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에 경악하게 된다.(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두가지 층위의 충돌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두뇌는 인지할 수 있는 것을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하는 것도 기의와 기표사이의 관계가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하나의 실례이다.)

보드리야르의 사진은 물리적으로는 꽤나 많은 트릭이 구사되어 있다. 빛과 공간성의 원리를 토대로 하나씩 풀어나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트릭이지만 트릭은 그 존재만으로도 비현실성을 강화한다. 트릭은 단지 눈속임이 아니라 그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의 근거가 되고 이미지(혹은 기의)를 해석하는 약속이 되며, 하나의 시뮬라크르이다. 아니 이 트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시뮬라시옹 상태에 빠져 그의 사진에 몰입할 수 없다.

그의 사진은 보드리야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매체가 된다. 심술 굳은 마음씨 나쁜 노인처럼 그는 사진을 들이대고 이것을 이미지로 봐달라 부탁하며 수수께끼를 출제한다. 우리는 시뮬라시옹 상태에서 수많은 시뮬라크르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점차 실체에 다가서게 된다.

하지만 출제자와의 싸움은 불공정한 싸움이다. 우리가 트릭을 발견하면 할수록 발견하지 못한 시뮬라크르의 난이도는 계속 높아만 간다. 결국 모든 시뮬라크르을 인식해 냄으로써 실체 혹은 현실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되고 보드리야르가 당부한 이미지를 이미지로 이해해야 한다는 시뮬라시옹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코너에 몰리게 된다.(그리고 코너에 몰리다 보면 결국에는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존재하지 않은 세계 혹은 환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패배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세계’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대화는 즐겁다. 정답을 알 수 없는 대화가 주는 필연적인 씁쓸함이 이곳에는 없다. 그와의 대화는 위트 있으면서 지적이며, 예리하다. 그는 현실의 비굴함과 비천함을 들어냄으로써 사유를 강요하지 않는다. 강요 받지 않은 사유는 상상에 가까운 것이고, 상상은 지루하기 보다는 재미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사진은 즐겁고 재미있다.

Modified 2005.7.8
사진전을 다녀온 누이에게 벌목된 나무에서 어떤 느낌이 났었냐고 물었다. 누이는 베어진 나무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숲’의 존재감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시뮬라시옹과 보드리야르라는 명성에 눌려 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같은 것을 떠올랐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머리속에 기억된 정보를 토대로 갤러리를 재구성해 봤다. 누이의 말대로 동굴 처럼 갇힌 공간을 벗어나면 나무에 대한 해답이 걸려 있었다. 텅 비어있지만 비어있지 않은 그 의자 속에서 한 남자의 굳건한 등허리를 보았던 것처럼, 수많은 그림의 흔적을 느꼈던 것처럼 나는 의당 베어진 나무에서 숲의 존재를 느끼고, 숲 자체가 전부였던 이른 봄날의 멋진 그림들을 생각해냈어야 옳다.

[#M_ P.S. | less.. |
다만 사진 찍는 아저씨들, 제발 콘트라스트과 초점을 토대로 그의 사진을 평가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그는 사진작가가 아니며, 회랑은 인터넷상의 게시판이 아니다. 기계론적 담론은 언제 들어도 공허하며 의미없다. 맥락을 파악하려는 노력없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_M#]

1 thought on “존재하지 않는 세계”

  1. 사소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고 저 또한 그랬던 것을 여기서도 발견하니 웬걸 반갑기까지 합니다.
    “시뮬라르크 -> 시뮬라크르 [simulacre]”

    사소한 실수이며 전체 의미에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비밀글로 남기니, 수정 후 쓸모없어진 코멘트는 가볍게 지워주세요.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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