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첫번째 날
17살부터 지금까지 난 체스게임의 오프닝으로 ‘왕의 첫 수’를 사용한다. 예전에는 나이트를 먼저 올리거나, 시실리안 오프닝을 애용했었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왕의 첫수’만큼 정직하고, 곧은 첫수는 없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왕의 첫 수’는 치명적인 약점이 너무 많다. 유명한 ‘첫수’인 만큼 대처법도 잘 마련되어 있고 기물의 유기적인 연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너무 무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평생동안 ‘왕의 첫 수’를 사용할 것이다. 내가 즐기는 체스는 기물 교환을 통한 난타전이 아니라 다분히 심리게임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어떻게 속일 것인가? 상대가 읽지 못하는 보드의 맹점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밀고 당기는 신경전에서 전열이 허물어졌을 때 상대는 피스 하나의 손실로 인해 질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그 짧은 순간에 생겨나는 틈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 물론 이런 식의 체스는 진짜 인간과 보드를 마주보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짜릿함을 즐기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내 이름은 빨강>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난 이것이 보드의 형태가 다른 체스게임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화자들은 하나의 기물이고, 이 기물들의 증언을 통해서 이들은 서로를 보호하고 강화한다. 하지만 이런 정보는 맞은편에 앉은 작가가 나를 기만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만들어 낸 시선임이 틀림없다. 내가 진정한 의도를 게임의 끝에서나 알아내도록 그는 의도적으로 내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인자의 말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혹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가장 현명한 행마법은 살인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기란 너무 유혹이 크다. 그의 진술에 존재하는 작은 실수나 틈새를 찾아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진술에는 항상 거짓과 진실이 함께 담겨져 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모든 진술에는 거짓과 진실이 함께 담겨져 있다.

냉철한 정신은 수많은 진술에서 단 하나의 공리를 찾아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소설의 절반을 읽은 지금 얻어낸 가장 논리적인 공리는 ‘엘레강스가 죽었다’는 것 하나뿐이다. 어쩌면 살인자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죽은 엘레강스는 스스로의 죽음에 놀라 헛소리를 지껄인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 살인자는 커피하우스에서 가짜 금화를 사용했고,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 또 다른 대가인 황새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어쩌면 황새가 엘레강스의 살인자일지도 모른다. 나비가 사랑하는 아내의 엉덩이는 우리를 속이기 위한 거짓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살인자는 에니시테 자신이나, 카라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까지는 여기까지이다.

두번째 날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난 첫째날 내가 추리해 낸 것이 결정적 단서는 아니더라도 사태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단서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카라와 세큐레의 결혼식이 있은 다음부터 추리소설의 긴장감은 몽환적인 이야기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더이상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냐는 사실이 아니다. 범인을 찾아내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진술 사이에서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발생한 살인이 무엇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알아낸다면 범인을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은 무의미하다.

<내 이름은 빨강>은 서글프면서도 따스하며, 곡조가 슬픈 비가이면서도 추억을 회상하는 여유가 담긴 이야기다. 이렇게 따스하면서도 마음 아픈 묘사를 이토록 정감있고, 다정하며, 비겁하지 않게 묘사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이야기의 두축인 세밀화가에 대한 이야기, 카라와 세큐레의 기이한 사랑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다. 이런 소설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대신에 범인을 추척하기 위해 하루를 보낸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 수 없을 만큼 잘된 책이다.

하지만 작품 밖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 소설의 핵심은 서양의 원근법에 있지 않다. 이 책에서 벌어지는 서양의 영향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욕망’ 혹은 ‘나 자신의 것’ 이다. 갈등의 원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처음 맞이하는 위기도, 처음 겪는 갈등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쉬운 해석에 이끌린다. 서구의 원근법의 영향으로 사라져가는 세밀화가들의 이야기. 이 얼마나 쉽고 간결한 이해인가? 허나 이런 이해로는 오르한 파묵이 창조해 낸 낭만적이다 못해 몽환적이며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 아픈 이 세계를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내 책장에는 르네상스를 다룬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이 가운데에서는 <내 이름은 빨강>의 배경으로 보이는 시대에 대한 정보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본 오르한의 세계는 오스만의 두 시대가 묘하게 겹쳐 있다. 벨리니의 화풍이 오스만에 소개된 것은 15세기의 일이며, 에니시테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보았을 베네치아의 그림에 대한 묘사는 베네치아파의 틴토레토나 매너리즘 화풍이라기 보다는 르네상스의 대가들의 것에 가깝다. 하지만 무라드3세 치세의 사건으로 보이는 <내 이름의 빨강>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사파비 왕조와의 전쟁과 셀림1세의 타브리즈 점령이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세밀화의 발전은 그 시대의 일이 틀림없다.

셀주크 투르크의 분열이후 이슬람 세계를 지배했던 화려한 궁정과 잔혹성의 계승자는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아니며, 오스만이 계승한 것은 클르츠 아르슬란이 제시한 위대한 비잔틴의 정복자가 되고 싶었던 왕조의 야망이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사실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런 것들을 기억해 내고 분석하느라 눈멈과 경이로운 세밀화가들의 세계와 당돌한 메세지를 전하는 세큐레의 욕망을 놓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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