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riers to Entry

리더기를 읽다가 mi-ring이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작 스물 다섯 남짓인 내 리더기의 소스를 고려해 볼 때 관련 포스트가 십여 개가 넘었고, 이 정도면 무언가 정말 특별하고 재미난 책이 출현했을 때를 능가하는 반응이었다. 사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결국 난 또 다시 호기심의 노예가 되었고 mi-ring이 무엇인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가입 조건이 까다로웠다. ‘여성주의, 소수자 운동에 동의하거나 이를 지지하는가’ 라는 물음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남성주의자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로 난 여성주의에 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여성주의 경제학은 가벼운 마음으로 공부한 적이 있다. 하지만 여성주의 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여성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전적 정의에 가까운 뜻조차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모른다는 말이 정답에 가깝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에 관해서, 깊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문제에 관해서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분명한 넌센스이다. 더욱이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아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이해하지 못한 것을 지지하거나 동의할 수는 없다. 마음은 선뜻 지지를 표명하지만 판단을 마음에 맡기는 것처럼 화를 자초하는 일은 없다. 결국 난 첫번째 난관을 넘지 못하고 페이지를 닫아야만 했다.

초등학교를 제외한다면 난 여태 남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교내의 단 한명의 여성도 있지 않았던 완벽한 금녀의 구역이었고, 사발식과 FM이 존재하는 대학 역시 남녀공학 이라기보다는 남학교에 가까웠다. 아니 복학을 하게 된다면 그때쯤에는 허물없는 친구들은 모두 졸업한 다음이니 사실상 남학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마초이즘의 숭배자냐고 묻는다면 난 아마 고개를 절래 흔들 것이다. 나에게는 승냥이 같은 녀석들에게서 지켜야 할 누이가 셋이나 있으며, 사회적 불평등에 평생 괴로워야 할 지인들의 반이 여성이다. 마초 Y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저질 농담이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가 한동안 피곤한 학교 생활을 감수했으며, FOB같은 접대를 지칭하는 농담에 웃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혐오하는 것이 근거 없는 남성우월주의인지, 아니면 질 나쁜 폭력인지 아니면 마초이즘인지 난 구분할 수 없다. 사실 난 남성우월주의에 관해서, 혹은 마초이즘에 관해서 한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비슷한 이유로 여성주의에 역시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으며, 이들 사이의 관련성과 방향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난 근본적으로 모든 차별은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차별이 남자와 여자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다수와 소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모든 관계 맺음은 차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추상적인 이타심에 대한 동의인 것일까?

그렇다면 이기적인 나로서는 이런 이타심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만약 실질적인 이타심 차원에서 부조리한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나 역시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추상적 이타심과 실질적인 이타심의 구분은 무척 애매하다. 결국 ‘여성주의, 소수자 운동에 동의하거나 이를 지지하는가’라는 질문은 나처럼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삶에 만족합니까’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부조리한 차별에는 반대하는 여성주의, 소수자 운동에 동의하거나 지지하는가’ 라고 질문마저도 ‘부조리한’ 이란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수많은 의미에 모두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첫번째 관문에서 내가 좌절했던 이유는 단지 잘 몰랐다는 이유 하나만은 아닌 것 같다. 난 그것에 대한 동의가 진심이 아닌 진정한 선호를 숨기는 전략적 의사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예의 바르고, 멋진 인간상에 근접하려면 요즘의 남성들에게 약자에 대한 배려는 필수다. 하지만 그 배려가 진심이 아닌 전략적 동기에서 연원하는 것이라면 솔직히 막 나가는 무뢰배보다 더 나쁘다.

오랫동안 형성된 습관과 지속적인 교육은 의지를 숨기는데 최적의 도구다. 때로는 의지가 너무 잘 숨겨져서 그 태도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이유로 난 끊임없이 지금 내가 전략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첫째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아느냐의 문제고, 두번째 문제는 그것이 과연 내 진정한 선호인가에 대한 문제다.

냉정하게 따져보지 않아도 난 ‘다수’에 속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어쩌면 그 ‘다수’ 안에서도 이너 서클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소수를 이해한다는 말은 고양이가 개에 관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이없는 발언이란 생각이 든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결국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관해 동의하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행동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파블로프의 개처럼 무조건 반사를 보인다. 어떤 의무감이랄까? 그것이 내 본성에 기인한 것인지 사회적 훈련과 기대에 의해 학습된 것인지 모른 채 무언가 행동으로 옮겨야 할 초초함에 쫓긴다.
[#M_ more.. | less.. | P.S. 1st
글을 작성하고 퍼블릭을 시키려는 순간 이것 역시 최선의 전략적 행동의 일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지하지만 유보한다는 말은 정치적 협상에서나 사용될만한 매우 비겁한 어휘다. 수많은 협상 관련 강의나 저술에서 가르치는 협상의 제1법칙은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의 상황을 이해 시켜라’라는 문장이다. 내가 쓴 글이 이와 다를 바가 없기에 퍼블릭 시키려는 손이 부끄러웠다.

P.S 2nd
오래지 않아 비슷한 고민이 담긴 글들이 리더기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리더기에 올라온 글을 읽으며 충분한 공감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논란에 휩쓸리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해결책을 실행시킬 만한 수단과 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은 논파 당하는 쪽이나, 논파 하는 쪽에게나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mi-ring의 멤버가 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율 가입 과정보다는 invitation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이 노출효과를 온전히 누리지는 못했겠지만 더 단단한 결집력을 유지하면서 연대의 크기를 키워나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율 가입이란 스스로의 기준과 책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연대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가이드 라인에 비해 편차가 심한 것이 보통이다.

이 경우 스펙트럼차에 따른 연대 내부의 차이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와 역량이 소모될지도 모른다. 선도 그룹의 에너지와 역량이 후발 그룹을 원활하게 조정(코디네이션)할 수 있을 만큼 축적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충분한 전염 효과를 누리기 어렵다. 이 경우 선도 그룹은 연대 내부에서 다시 ‘소수’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며 이 경우 최악의 경우 연대의 붕괴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자율성은 연대의 기본 요건이다. 하지만 충분한 자율성이 연대의 생존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많은 내부적 고민이 있겠지만 내 호의가 전략적 선택이던 그렇지 않던 간에 ‘연대’가 하나의 가능성이 이상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P.S. 3rd
아침에 어떤 포스트를 보고 슬쩍 포스팅을 공개로 돌리기로 마음 먹었다. 내 블로그의 특성상 여파가 거의 없으리라는 점도 고려 요소였지만 무엇보다 그 포스트를 읽고 있노라니 지닌 바 모두를 일신의 평안함을 위해 쓰고 있는 내 모습이 비겁하고, 치졸해 보였기 때문이다. _M#]

2 thoughts on “Barriers to Entry”

  1. 간간히 리더기를 통해 글을 읽다가 mi-ring에 관해 포스팅하셨길래 답글을 남겨요. 특히 덧붙임말에 눈길이 가네요.
    두번째 덧붙임 말은 깊게 공감이 가는 부분이에요. 현재 늘어나는 회원에 대한 관리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 괜찮으시다면 웹링운영진 게시판에 일부 옮겨가고도 싶은데요. 어떠세요?

  2. 피오넬님 찾아 주셔서 반가워요. 짧은 소견이지만 도움이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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