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의 유혹

<라파엘로의 유혹>은 근래 들어 내가 만난 가장 얇은 소설가운데 하나다. 물론 내용이 얕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께가 매우 얇다는 의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안 피어스의 명성이나 이탈리안 마스터즈 미스터리의 첫번째 이야기라는 화려한 수사에 비해 다소 조악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라파엘로의 유혹>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며, 인물 역시 평면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재미없는 소설로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장면의 전환 때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정도의 틈을 제외한다면 정말 단숨에 있을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안 피어스의 글은 지인의 평가대로라면 소설가가 아닌 먹물이 쓴 소설의 표본이다. 그의 소설은 독자의 상상력 대신 지식과 정보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의 소설을 읽는데 상상력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백과사전처럼 머리 속에 정리되어 있는 정보를 쉽게 꺼내보는 재주가 필요하다. 오래 전부터 알아온 정보를 토대로 그가 말하고 하는 바와 배경을 그려내는 것. 이 재주야 말로 단조로운 그의 소설을 재미나게 즐기는 요령이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꾼이 아닌 천부적인 재능 없이도 누구나 쓸 수 있는 리포터의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런 까닭으로 그의 소설은 문체에 집중할 필요조차 없다. 그의 소설에서 읽어야 할 것은 인물의 내면 심리가 아니라 그저 진행 중인 사건 하나 뿐이다. 진행 중인 사건에 백과사전에서 찾아낸 정보를 토대로 살을 입히며 머리 속으로 나름대로의 영화 한편을 제작하는 것. 이 정도가 그의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다.

비록 이안 피어스가 외부적 갈등을 테마로 변주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그린 세상은 월트 디즈니조차 경의를 표할 만큼 갈등 없는 천진난만한 세계다. 이 정도면 그가 소설가로서 빈곤한 재능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핑거포스트 1663>을 읽는 중이고, <티치아노 위원회>나 <스키피오의 꿈>을 살 예정이다. 소설가로서의 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평면적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여백을 마음껏 장식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소설은 나의 소설로 탈바꿈 된다. 시폰 케이크을 사서 생크림을 직접 바르고, 그 위에 데코레이션을 올리는 기분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M_P.S.|less..| <라파엘로의 유혹>을 읽기 전에 데코레이션 기법을 익히기 위한 책으로는 장 자크 피슈테르의 <태양의 가면>과 마이클 프레인의 <곤두박질>을 권한다. 이 2권의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 <라파엘로의 유혹>을 읽는다면 어째서 언론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그를 폄하하는지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작의 모티브와, 명작의 손실 혹은 손괴가 이루어지는 모티브는 위의 두 권과 매우 유사하다. 게다가 주인공 대학원생의 이미지와 이탈리아 수사관의 이미지는 바이어트의 <소유>의 분위기와 유사하며. 살인 사건은 빈텐부르크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미술품 담당 기동대의 책임자에 대한 묘사는 엘러리 퀸의 추리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름 난 신문의 서평 전문 기자들의 사랑을 받는 그에게 던지는 이런 비아냥은 온전하게 질투로 보이는 법인 것을…_M#]

1 thought on “라파엘로의 유혹”

  1. 핑거포스트를 재밌게 읽었던터라 앞으로 나올 이언 피어스의 책은 전부 사모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아주 더디게 신간이 나오는 것 같지만.. 무사히 그의 전집이 출판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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