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내가 가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문화>는 1983년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세로쓰기판이다. 세로쓰기 판답게 한자가 가득하고, 표기법도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80년대의 단조로운 학술서적 특유의 문체를 그대로 지닌 이 책의 미덕은 한 30페이지쯤 읽다 보면 두통이 생기고, 50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반드시 잠에 빠져든다는 사실이다. 아니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난독증에 걸린 사람처럼 읽고 있던 행을 놓치게 된다. 글을 처음 배웠던 어린 시절 문단의 끝을 가늠하지 못하고 기진맥진 하곤 했던 옛추억을 환기시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문화>를 아낀다. 그 속에는 칼라프린트가 귀하던 시절에 인쇄해 놓은 이탈리아 전도가 있고, 영문 표기법으로 옮겨놓은 인명록도 보인다. 흑백 도판 속에서 숨쉬고 있는 인물들의 초상과 회화들은 딕슨의 화려한 <르네상스 미술 기행>보다 더 많은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하긴 이 책이 놓여 있는 책장의 섹션에서 이 책만큼 낡은 책은 없다. 제본 방식에서나, 손때에서나 이 책은 투박하고 견고하며 강인하다.

그런데 내 책장에서 르네상스를 다룬 최고의 책으로 꼽히던 이 책이 하루 아침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폴 존슨의 <르네상스>가 부르크하르트를 그 자리에서 밀어내는 반란을 일으킨 덕분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폴 존슨의 <르네상스>는 총서에 묶인 소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작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이책이 주는 감동은 800여 페이지가 넘는 부르크하르트의 단조로운 문장을 능가한다.

사실 <르네상스>는 영국인 특유의 고집스러움을 제외하면 흠잡을 곳이 없다. 6개 챕터로 나뉜 구성은 탄탄하고, 각 챕터에 등장하는 인물의 평가 역시 공정하며 기술의 신중함과 문장의 빼어남을 자랑한다. 고작 몇페이지에 불과한 지면에 담긴 거장들에 대한 그의 평가와 감상은 수백 페이지 짜리 전기가 주는 감동을 앞선다. 압축적인 그의 문장을 따라가며 그의 생각을 읽고, 그의 감상이 나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또 한번 감동하고 나면 책장은 어느새 맨 뒤로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입가에서는 달콤한 웃음이 사라지지 않으며, 마음 속은 포만감으로 배고프지 않다. 그의 문장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지만 그 준비를 다 갖춘 상태라면 문장 속에 숨겨진 그의 의도를 읽기에 부족하지 않고 되려 그와 대담을 나누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물론 사람이 만든 만큼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다. 번역상의 치명적인 오류가 몇 가지 보이기도 하고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서 바로 잡히지 않은 연도는 생각의 흐름을 방해하고 작가와의 대담을 끊기게 만든다. 조각과 회화, 건축에 대한 기술의 빼어남을 인쇄술과 인문주의에서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가 넌지시 언급만 하고 넘어간 수많은 이야기를 기억해 내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르네상스의 태동’과 ‘전성기 르네상스’에 에너지를 낭비하다가 매너리즘 화풍과 카라바지오로 시작되는 바로크의 시작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아서 좋다. 그는 꽃의 도시 피렌체에만 호의적인 것도,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에만 호의적인 것도 아니며, 로마 약탈로 르네상스가 절단 났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상업과 경제적 발전의 힘에 관해서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를 무시하고 있지 않으며, 거장들의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에도 솔직하다. 뭐랄까? 개인적은 소회를 피력하자면 이 책을 다 읽고나면 복잡하게 얽혀 있던 르네상스라는 매듭이 말끔하게 풀리는 기분에 휩쓸린다.
[#M_ P.S. | less.. |
덧붙이자면 사회사로서 ‘르네상스’를 잘 다루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화사로서의 <르네상스>는 하우저씨에게 도전할 수 없고, 독특한 필치로는 곰브리치가 묘사한 <르네상스>를 따라잡기 버겁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읽은 만한 책인 것은 분명하며, 거장에 대한 평가에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난 폴 존슨의 평가와 비평에 동의하는 편이다.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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