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문의 비밀

여름을 보내고 문득 가을이 왔음을 느꼈던 어느 오후, 나는 이제는 쇠락해 버린 시내서점에서 <방각본살인사건>을 종이봉투에 담아왔다. 그렇게 백탑파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이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를 읽으며 난 소설과 거리가 먼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소설을 내 삶의 새로운 시작으로 삼아 보기로 말이다. 몇달 동안 아니 한해 동안 나를 힘겹게 만들었던 번다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 또한 꽃에 미친 선비인 花狂 김진처럼 다른 무언가에 미쳐 보고 싶었다. 그렇게 두해가 흘렀다.

스물 다섯 유월에 김탁환은 두번째 이야기를 들고 나타났다. 사실 텔레비전에서 방영중인 <불멸의 이순신>의 작가로 더욱 널리 알려진 그였기에, 거기에 더해 개혁이란 달콤하지만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솜사탕에 매료된 그였기에 다시 그의 소설에 손을 대는 것이 잠시 망설여졌다. 하지만 백탑 서생에 대한 아릿한 동경은 작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또 다시 책장을 열게 만들었다. 그렇게 <열녀문의 비밀>은 시작되었다.

<열녀문의 비밀>은 썩 잘 된 소설은 아니다. 역사추리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만 트릭이 단순하고 이야기 전개가 평범하다. 하지만 배경과 인물만큼은 사용된 우리말의 다채로움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가 아깝지 않다.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백탑 선비들(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야기는 묘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책에 미친 바보로 불리는 형암 이덕무, 울분을 거칠고 차가운 말쓰임으로 푸는 초정 박제가, 무예보통지의 저자 야뇌 백동수와 단원 김홍도, 그리고 소설의 화자인 청천 이명방과 18세기 조선의 셜록 홈즈 화광 김진. 이들이 풀어나가는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근대로 나아가려는 흐름을 내포한 축약적인 시대상이다. 하지만 이들의 미래는 밝지 않다. 회고를 통해 들어 나는 이들의 실패와 낙담은 맑게 퍼져나가는 슬픔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한계와 좌절이 전면에 부상해 있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심금을 울린다고 해야 할까?(이들은 심금을 울리지만 현재의 그들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열녀문의 비밀>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이 시리즈의 첫 권인 <방각본살인사건>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첫째 권을 건너뛰고 곧바로 <열녀문의 비밀>을 읽을 경우 작가가 의도한 인물과 다른 방식으로 인물을 이해할 수도 있다. 아니 많은 부분에서 작가는 첫 권에 묘사한 인물을 빌려 쓴다. 둘째 권의 인물들은 성격 묘사 위주가 아니라 대화와 행동을 위주로 서술된다. 인물의 지닌 배경과 태도를 알기 위해서는 첫 권이 반드시 필요하다. 첫 권을 읽지 않고 둘째 권을 읽는 것은 <열녀문의 비밀>을 구조가 엉성한 산문 나부랭이로 만들 우려가 있다.

다음으로 꼭 필요한 것은 좀처럼 쓰이지 않는 아름다운 우리말과 고풍스러운 문투를 담기 위한 메모지이다. 이 소설의 목표는 단순히 백탑파를 묘사하고, 개혁을 외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런 내심보다는 우리말의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공들인 배려가 더욱 눈에 띈다. 사실 김탁환의 백탑파 이야기는 책장에 모셔두고 계속 꺼내 볼만큼 높은 완성도를 지닌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심한 방학 오후 도서관에서 뉘엄 뉘엄지는 햇살을 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딱 알맞은 책이다.
[#M_ P.S. | less.. | 내가 스물 일곱 되는 해에 그는 세번째 이야기를 출간하겠다고 한다. 그때에는 길고 험난한 내 여행이 끝나고 느긋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두번째 이야기에서 잠시 등장한 단원의 8첩 병풍이 까닭 모르게 친숙했다. 냉매와 동기창의 산수화를 포함해서… _M#]

8 thoughts on “열녀문의 비밀”

  1. 책 가져가네…
    곧 돌려주겠음
    오는 길에 버스에서 상은 다 읽었다네..
    으하하하
    담에 단테 신곡 봐야지 ㅎㅎ

  2. 잠시 집을 비운 틈에 책장을 폭격해 놓고 가다니.
    어서 Mrs. 마플이나 되라!!
    그리고 단테 神曲이 아니라 ‘Dante Club’이야.

  3. 맞다
    단테클럽….
    이누나가 드디어 치매가 오려나보다 ㅎㅎ
    알랴뷰…..

  4. 맨 마지막 문장만 없었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휴가철에 이것저것 장기 대여를 해주려고 했었는데
    좋다 말았구먼…

  5. 답글이 많이 늦었네요.^^ 역사 소설의 경우 범위가 꽤 넓습니다. 관심도 따라 흥미도 달라지게 되구요. 그리고 가능하면 신문에 연재되었던 장편 역사 소설쪽을 읽으시는 것이 더 흥미롭습니다.

    우선 뒤마의 <여왕 마고>를 추천해 드릴께요. 이 소설은 94년에 영화화 되기도 했고 이 소설을 시발점으로 다양한 유럽의 역사 소설을 섭렵하기 좋거든요. 중국역사소설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는 김팔봉씨의 <초한지>가 제일 잘 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오래된 만큼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기법이 조금 낡지 않았나 염려 되는군요.

    사실 우리 역사를 다룬 소설의 경우에는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여전히 읽을만한 소설이 아직까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극과 함께 유행처럼 번져나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때를 놓치면 구하기도 어렵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얄팍한 의도가 눈에 거슬리거든요.

    만약 역사 소설이 팩트 소설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단연 <푸코의 진자>를 첫번째로 삼으실 것을 권합니다. 어렵고 지루하다는 감상평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발단 부분까지만 읽으시고 주인공이 브라질에서 귀국한 이후로 건너뛰어도 이해에는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푸코의 진자>를 넘지 못하면 그 이후의 대부분의 팩트 소설들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즐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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