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ism

2월 마지막주 금요일 오전 8시 17분. 1호선
텅 빈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자니 멀리서 뛰어오는 한 형체가 보였다. 평소라면 절대 나오지 않을 커다란 보폭, 달리기의 기본 자세가 잡힌 날렵함으로 계단을 뛰어내려온 그녀는 겨우 지하철에 올라탄다. 그리곤 이내 텅 빈 차량을 쓱 둘러보더니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옆자리에 앉는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팔목의 단추를 정리하고, 덜 마른 머리칼을 매만진다. 익숙한 향기가 코를 감는다. 이 향수와 린스는 누가 쓰던 것이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머리칼을 만지는 손가락에서 반지가 빛을 낸다. 오똑한 콧날과 작은 입술이 시선을 붙잡는다. 무엇보다 쌀쌀함이 반, 귀찮음이 반 섞인 눈빛이 마음에 든다. 갑자기 하루키가 기술한 어느 장면이 머리 속을 스친다.

중요한 시험을 보는 아침. 옆자리에 앉은 한 여자의 아름다움과 오래 전에 읽은 한 이야기를 되새기고 있는 난 어딘지 이상하다. 하지만 난 정말 심각하게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고 있었고, 혹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한쪽에서는 이런 망상의 재발이 시험 부담감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진단을 내리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런 잡스런 생각이 오늘의 불행을 자조할 것이라는 거의 미신에 가까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몸을 조금씩 줄여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나에게는 사소한 접촉으로도 생각을 읽힐 수 있다는 연원을 알 수 없는 뿌리 깊은 미신이 남아있다. 지독한 긴장감 때문이라고 변명하기에는 귓가를 울리는 음악이 매우 평화로웠고, 시간 여유도 충분했으며, 무엇보다 긴장의 징후인 목소리 톤의 변화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자켓의 왼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결국은 몽상과 현실의 경계에 놓인 눈꺼풀을 힐끗 쳐다본다. 그리곤 이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핸드폰을 꺼내려다 발생한 실수쯤으로 봐줄 수 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텅빈 맞은편의 차창을 통해 내가 눈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幻의 세가지 의미와 실제
흥미로운 사건이다. 우연히 수첩을 넘기다가 발견한 이 메모는 지난 2월 이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이 파렴치한 메모를 읽는 순간 당시의 상황에 또렷이 기억났다는 데 있다. 이 메모에는 몇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투명한 차창에 비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바라보기에는 내 시력은 너무 약하다. 무엇보다 난 옆자리에 앉은 작은 아가씨를 곁눈질로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체구가 아니고(사실 이런 경우 허공만 보인다), 고개를 돌려 세심하게 관찰할 만큼 뻔뻔스럽지도 못하다. 내가 받은 교육은 꽤나 보수적인 것이고 위험확실등가액이 상당히 높은 위험기피자이기에-말은 어렵지만 겁이 많다는 이야기다- 애초에 이런 일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이 메모는 순간의 포착을 영속화 시킨 우를 범한 전형적인 환상이다. 더블 스크린을 읽으면서 환의 세가지 의미에 대해서 이제야 또렷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쓴 글은 명백한 일루젼니즘이다.

아마 이 글에서 실제했던 것은 급하게 뛰어나오니라고 머리칼을 미쳐 다 말리지 못한 한 아름다운 사람이 지하철에 뛰어 올랐다는 한가지 사실 뿐일 것이다. 덜 마른 머리칼을 매만지는 것은 오래된 다른 친구의 버릇이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팔목의 단추를 정리하는 것은 내 버릇이다. 머리카락을 말아쥔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반지의 이미지는 내가 사랑했던 한 여자의 버릇이며, 오똑한 콧날과 작은 입술은 이보다 두해 전 어느 수업시간에 봤던 모습임이 틀림없다. 단 한가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신비는 그녀를 보자마자 Anna Karenina에 등장하는 Kitty가 생각났으며 그 인상이 반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루젼네이션을 넘은 마법적 작용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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