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그 한가운데에서

1.
휘몰아 치듯 내리던 비가 그쳤다. 하늘이 맑고 푸르다. 입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 하늘이 높고 너르다. 하지만 계절을 앞서나가는 것은 하늘과 낙엽지기 시작한 은행나무 뿐이다. 아직 햇살은 뜨겁고, 휴가철은 성수기를 보이고 있으며, 냉방이 되지 않는 실외에서는 숨쉬기 조차 어렵다. 무엇보다 무더위에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지쳐버린 육신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신 레모네이드가 마시고 싶다고 되뇌이게 만들 정도로.

2.
결국 오늘은 위클리 스케쥴러에 To do List를 기입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시원한 음악을 들으며 부채를 벗삼아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읽는 것 하나뿐이다. 아 퇴청한 후에는 막내 누이의 친구 분에게 몽테크리스토백작 전질을 빌려주기로 했다. 에드몽 당테스의 복수를 읽는 것이 한여름 나만의 피서법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 옛날이여!

3.
Pat Metheny의 음악은 사람을 더욱 쳐지게 만든다. 아무래도 조금 더 흥겨운 것으로 바꾸어야 할 모양이다. 갑자기 Smells like teen spirit가 듣고 싶어진다. 고등학생 시기의 여름에는 항상 MTV unplugged in New York를 즐겨 듣곤 했었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생각났다.

4.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정복한 누이가 고전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어제 그녀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챙겨 들고 시골로 내려갔다. 위대한 아테네인들이 분열하고, 초라해지는 과정을 보며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인데 내가 가진 8.5포인트 판은 그녀의 눈멈에 대한 공포를 자극할 것이 분명하므로 새로 번역된 다른 판본을 구매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판본은 85년에 출간된 내 영웅전과 달리 영어와 그리스어, 라틴어 표기법이 뒤섞인 구제 불능의 번역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권 당 두께가 800여 페이지가 넘는 묵직함이 마음에 든다. 누이는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하지만 이 정도 무게면 치한 퇴치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용이다.

5.
K군은 태국 여행 이후 해외여행증후군에 감염되었다. 문제는 감염자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여행 못 간 사람 염장지르기> 같은 특정 징후가 진행중이라는 사실이다. 이틀전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N군은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자극하는데 말이다. 솔직히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한여름 더위에 지친 나도 케이블의 여행 채널에서 보이는 푸른 바다와 백사장에 끌린다. 오일 마사지와 칵테일, 해변에서 마시는 병맥주. 나에게도 방학이, 휴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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