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말할 것도 없고(To say nothing of the dog)

요즘의 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관심을 가장한 ‘대화 잇기’용 멘트와 부딪힐 때마다 예의 바르게 화제를 돌리거나 뻔뻔한 표정으로 食言을 하곤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난 조금 더 순진했던 것 같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바닐라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는 표정으로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이라고 길게 늘여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헬레나 본햄 카터의 우아하면서도 발랄한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불운한 다니엘 데이-루이스에게서 나를 발견했던 그 기분을 되새기며 말이다.

사실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읽으면서 <전망 좋은 방>을 되새기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는 내가 그렇게 따라 해보고 싶었던 그 유명한 키스신도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등장 인물의 캐릭터와 플롯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이야기 사이에는 감상의 연속성이란 개념이 존재한다. 전혀 다른 장르에 속한 다른 이야기임에도 이들은 바닐라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 느끼는 그런 달콤한 행복감을 똑같이 선사한다.

하지만 달콤함이 이 소설이 가진 전부는 아니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는 얄밉지 않은 소란스러움과 시끄럽지 않은 수다스러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게다가 시간여행 시리즈의 전편인 둠즈데이 북을 감싸고 있던 묵직한 분위기가 사라진 빈자리를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경쾌함이 대신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이나 <말괄량이 길들이기> 혹은 <십이야>의 한 장면 같은 희극적 재미를 발견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시공연속체’와 ‘네트’에 관해 전편과 다른 설정을 보이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인 <화재 감시원>을 읽는 다음에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전편에 등장했던 귀염둥이 악동 니콜도 등장하지 않고, 던위디씨는 까닭없이 거만해졌으며, 전편에서 사건에 급박함을 더해주었던 시간 여행의 위험성과 복잡한 단계는 이번 이야기에서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은 비중이 되었다. 무엇보다 코니 윌리스에게는 다른 SF 대가들이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를 능숙하게 변주해 내기 위해 사용한 치밀함과 진지함이 부족하다.

하지만 더 큰 약점은 뒷이야기가 너무 뻔히 보인다는 사실이다. <둠즈데이 북>을 읽은 독자라면 발단이 끝나는 부분에서 어렵지 않게 이야기의 끝을 짐작할 수 있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SF적 요소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치밀함과 진지함이 부족하고, 추리 소설적 재미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플롯이 너무 쉬운 소설인 셈이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의 소소한 재미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소란스러움과 경쾌함이 빚어내는 유쾌한 笑劇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꽤나 좋은 소설이다.

사실 이 소설을 언급하면서 <전망 좋은 방>을 언급하는 것은 이 소설의 줄거리를 모두 이야기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에는 반복적인 줄거리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독특한 중독성이 있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전망 좋은 방>을 보며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서 재미를 찾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 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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