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고누 첫수

1.
근래 들어 퇴청 이후 유야무야 녹아 내리던 시간을 이용해 ESL을 듣고 있다. 내년 여름에 떠날 어학연수를 준비하는 의미도 있고, 얼마남지 않은 휴가를 충실히 보내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옆자리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내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친구 녀석에게 끔찍하다는 표현까지 사용해가며 면박을 주곤한다. 하지만 이내 기막힌 카운터 펀치가 날라온다. 햇수를 헤아려 보니 우리가 이렇게 티격 태격 주고 받은 지도 어느새 십년이다.

십년 전 까까머리 소년들이 교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처럼 스물 다섯 먹은 청년 둘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포즈로 의자에 앉아 있다. 가끔 녀석의 흡연량에 반비례해 얇아지는 허벅지와 녀석의 공공연한 비밀인 양견 탈골을 가지고 놀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이내 지겨워진다. 시간 앞에서 새로울 것은 없다. 사람 많은 역사에서 녀석의 뺨을 매만지던 녀석의 옛 애인도, 녀석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던 어떤 소개팅도 이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럴 때면 시간이 참 무상하다는 감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십년 전 교실 뒷자리에서 눈을 붙이던 그 순간에는 우리가 십년 후에도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게 될 줄 알았을까?

2.
어느 사이에 휴학을 한지 2년이 넘었다. 그리고 이제는 슬슬 떠날 시기가 다가옴을 이곳 저곳에서 느끼고 있다. 이번에 떠나게 되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이곳의 모든 것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어린 시절 자주 걸어 다녔던 산책로와, 첫키스, 처음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숨겨진 이곳이 이제는 과거에 묻힐 참이다. 하지만 너무 지겹고 궁벽한 곳이 되어버렸어도 먼 훗날에는 내가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요즘의 난 더 늦기 전에 이곳을 다시 한번 걸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쫓긴다. 더 늦기 전에 이곳의 햇살과 구름, 해몰이의 어스름을 어딘가에 담아야 한다는 필요성에 쫓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3.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어 솔개 그늘로 숨기 무섭게 채찍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젖어 드는 어깨를 바라보고 있자니 웃음이 입에 걸렸다. 비에 젖어 드는 어깨는 내 기억의 특정 영역을 회상하게 만드는 쐐기돌 역할을 한다. <비 내리는 오후>, <좁은 검정 2단 우산>, <다람쥐 길>, <소강당>, <골든독> 같은 단어가 머리 속을 맴돈다. 내가 기억을 잃지 않은 이상 우리는 관계의 중첩으로 정의되는 사이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관계로 정의되는 사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솔개 그늘을 만든 늙은 소나무에게서 비냄새가 난다. 두해 전 그날에도 비냄새를 맡았다는 기억이 머리 속을 스친다.

4.
도서관의 회원증을 갱신하기 위해 챙겨온 증명 사진을 보고 있자니 새삼 놀랍다. 빠르게 성장한한 탓에 더 이상 노화가 진행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이 거짓으로 들어났기 때문이다. 그때와 비교해 보면 눈이 나이를 먹었다. 또렷한 눈망울 대신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는 눈망울이 어느 사이에 눈자리에 놓여 있다. 별로 기분 좋은 발견은 아니다. 이왕이면 이제는 책장 2개를 가득채우고도 모자라 거실 책장에 겹줄 꼽기로 보관중인 책이나, 스크롤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진 도큐멘트 파일, 머리 속을 채운 시험용 지식 같은 것을 발견하는 편이 더 행복하니 말이다.

5.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데 갑자기 친구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반가움에 깜짝 놀라 사인 곡선을 그리며 불러주던 내 이름이 갑작스레 너무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 시간으로는 너무 이른 시간이고, 결정적으로 녀석의 전화 번호를 까먹었다. 아이팟에 주소록을 싱크 시켜놓지 않은 부주의함을 탓하며 편지를 써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침 펜을 새로 샀다. 오래 전 읽은 정채봉의 <느낌표를 찾아서>에서처럼 새로운 펜을 살 때에는 그리운 친구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쓰는 것이 온당하다. 무의미한 동그라미로 펜촉을 길들이는 것보다는 보고픈 지기에게 묻는 안부로 시작되는 편지가 조금 더 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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