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언

꽤 많은 장서를 자랑하는 모교의 도서관과 멀어진 다음부터 난 도서관보다는 서점에서 구매하는 책을 중심으로 간서치의 삶을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는 서점에 들리는 것조차 여의치 않아 졌고, 점차 인터넷을 이용해 책을 사들이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친구들과 reviewer들 덕분에 후회할 만한 책들을 들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대형 사고를 치고 싶다는 이상한 속삭임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결국 끈질긴 속삭임에 지친 난 휴가를 포기한 대가라는 어설픈 핑계를 대며 스스로에게 공항 소설 두 질을 선물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성수의기사단>과 <이중설계> 그리고 <히스토리언>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딱히 내용이나 리뷰를 참조해가며 고민하기 보다는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구매할 수 있는 공항 소설 두 개를 골라 냈다. 그렇게 나의 대형 사고는 서막을 열고 무대에 뛰어 올랐다.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히스토리언>은 흡혈귀 혹은 드라큘라로 불리는 존재를 찾아가는 역사가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이다. 하지만 이 바닥의 권위자인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와 비교해 보자면 십대의 습작처럼 거칠고 조악하다. 무엇보다 스토리 라인과 플롯. 개연성 사이의 엇박자가 볼만하다. 게다가 캐릭터는 인형처럼 뻣뻣하고 현실감이 없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이유없이 남발되는 상상력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거기에 번역은 호오를 떠나서 한마디로 어설프다. 사실 이런 번역을 오랜 시간동안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행의 시작일지도 모를 정도다.

하지만 이런 소설에도 장점이 하나쯤은 있다. 작가가 지닌 재능의 한계를 바라보는 것은 악취미지만 훗날 진정한 대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그들의 재능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은 작품을 탄생시켰는지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책의 서평 혹은 독후감을 쓰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을 꼽으라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읽고 나서 그것에 관해 힐난하는 글을 쓰는 순간이다. 애당초 착하지 않은 성정이 그대로 들어 나는 것은 물론이고, 에둘러 말하는 평소의 조심성을 벗어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난은 칭찬보다 스트레스를 걷어 내는 데 한층 뛰어난 효능을 보인다. 게다가 <히스토리언>은 혹여 내가 틀리지는 않았나를 걱정할 필요없이 힘껏 혹평을 쏟아내도 꺼리낌이 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난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읽으며 난 레스타와 아르망 그리고 마리우스의 캐릭터에 한껏 반해 있었다. 모름지기 공항 소설에는 이런 자유로움과 기괴함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고 소리 내어 웃곤 했다. 공항 소설이 스스로의 본분을 잊고 재미없는 것은, 혹은 능수능란하지 못한 것은 죄악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히스토리언>은 올해 읽은 최악의 소설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런 소설을 읽고 거액을 들여 판권을 사들인 소니 픽쳐스의 경영진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M_ P.S. | less.. |
아무리 소재가 흥미로워도 캐릭터가 살이 있지 않고, 장면의 분절성이 너무 강하면 소설을 영상으로 옮길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영화라는 형태는 물론이고, 소설로도 볼만한 가치가 없다. 혹평하자면 이 소설을 읽느니 차라리 지금은 절판 되어 버린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구석진 도서관에서 꺼내 보는 것이 더 낫다.

심지어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마리우스의 이야기인 Blood and Gold를 사서 읽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덧붙여 <히스토리언>은 HR로 소설에 흥미를 붙인 저자가 각종 드라큘라의 자료를 짜깁기 해서 만든 십대 수준의 모조작이다. 이런 책을 구매하는 바보는 나 혼자만으로 족하다. _M#]

11 thoughts on “히스토리언”

  1. 워낙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대서 관심이 좀 갔었는데 아닌가보네요.

  2. 마구마구 쏟아지는 번역서들에서 옥석을 가려내기란 쉽지가 않죠^^ 먼저 본 분들이 그건 아니라고 봐요 라고 말해줄 때 어찌나 고맙던지요..

  3. //Julia
    좀 많이 아니예요. 다양한 시점과 스타일을 섞어 쓰다 보니 매우 어설픈 소설이 되어 버렸어요. 재미있게 읽어주려는 마음을 산산히 부셔 버린 정도예요. 그 뻔한 결말이 언제쯤에 나타날지를 기다리는 초초함 빼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

    //마빈
    주말에 다음 소설인 <이중설계>를 읽을 참인데 그것은 <히스토리언>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4.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성 수의 기사단, 이중설계는 이미 읽었습니다만, 히스토리언은 살까 말까 유행어로 존내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공간을 차지하는 것 외에는 가치가 별로 없는(아, 라면냄비 받침대로 쓰면 좋으려나요?;;) 책에 돈을 쓰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 수의 기사단과 이중설계는 광고를 너무 믿으시면 안 된단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3권의 책들이 전부 고만고만합니다. 요즘 팩트 소설이 득세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해도 너무했다 싶은 책들만 출간되고 있어서 팩트 소설 팬으로서 많이 슬프답니다.

  5. 고만고만하다니 갑자기 맥이 빠지는 걸요. <이중설계>는 이보다는 조금 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주말을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라면 받침으로 쓰기에도 너무 빨리 더러워지는 표지라 한구석에 학대하듯 방치하다가 바자같은 것으로 슬며시 방출해야 되겠습니다.

    모든 책이 고작 이런 재미 밖에 줄 수 없는 것이라면 독서마저 재미없는 일상이 되어 버리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재미난 읽을 거리가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출간된 팩트 소설들이 실망을 안겨주고 있긴 합니디만 한번쯤 이렇게 호되게 당해줘야 재미난 책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 같기도 하구요.

  6. 책을 읽는다라는 독서라는건 간접채험과 상상력속에서 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생각됩니다.

    이런점에서 볼때 히스토리언은 나름 매력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우선 유럽 여러나라의 모습을 약간이나마 채험할 수 있다는 점과 역사나 그에 얽힌 드라큐라에 대한 또다른 시각들은 나름 매력적으로 저의 상상력을 자극해 주더군요 ^^

    윗분들 말씀대로 번역부분이 미흡하고 그로인해 짜임에 원작보다도 많이 약해보일지 몰라도 나름데로 괜찮게 읽을만한 작품인듯 합니다. ^^

    1. 독서에 관한 일반론을 잠시 제쳐두고 보자면 <<히스토리언>>은 비슷한 소재의 다른 소설들이 이미 선보였던 맛깔쓰러운 상상력과 비틀린 유머에 한참 못미칩니다.

      간접 체험에 관해서라면 암스테르담까지 헝가리의 부다를 거쳐 이어지는 수많은 서술 가운데 지도 위를 벗어난 실경을 보여준다던지, 미쉘린 가이드를 벗어난 묘사는 하나도 없더군요. 처음부터 도시 이름이 가지는 뉘앙스와 스토리라인을 결합했다는 반증이지요.

      이 글을 쓰고 난 뒤에 우연히 원서를 읽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요. 원서의 짜임새 역시 기대에 못미쳤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얻은 가장 권위있는 타이틀은 ‘바캉스에 가지고 가기 좋은 책 1위’라는 워터스톤즈와 가디언지의 설문이라는 사실을 첨언하고 싶네요.

      어떤 책에나 찾으려고 노력을 한다면 나름의 재미를 찾아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름의 재미를 인정해주기 위해서 비평에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나름’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설명해버리기 시작하면 무엇이든지 용서해야하고 결국에는 재미 없는 소설들만 읽어야 할 슬픈 날이 올지도 모르거든요.

  7. 정말 캐공감입니다-_-

    영어선생이 하도 재밌다재밌다길래 읽고 있는데 이거야 뭐-_-

    도데체 뭐 쓸데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듯…

    아니 이건 뭐 완전히 역사학 설명해주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_-

    하아암 이거 다음주까지 리포트 내야 하는데 읽히지가 않으니 암울-_-ㅋ

    1. 힘겨우시겠습니다. 시간 때우기용으로 읽는 정도까지는 몰라도 주제를 잡아 글을 쓸만한 소설이 절대 아닌데 산넘어 산이로군요.

  8. 정말 공감하는 글이네요
    첨엔 제목하고 무슨 몇억에 영화판권 계약이라길래
    너무 기대를 하고 봤는지…
    다 읽을때까지 어? 이게끝?
    읽는내내 산만하고 정확히 하고싶은말이 제대로 전해지지도 않고…
    친구가 너무재밌다고 빌려봤는데…
    글씨체가 커서 읽히긴 잘읽히는데 무지하게 재미없더라구요 ㅋㅋ
    언제쯤 본론이 나오는게냐! 이생각으로 봤는데 그러다 끝-_-;ㅋㅋㅋ

    1. 친구가 권해주는 책이 모두 재미있는 것은 아닌 법이지요.
      대체로 이런 소설들은 바캉스 소설이라고 불리는 소설로 5월 초에 출간되어 6월에 입소문을 타고 여름에 잠깐 읽히다가 영원히 독자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 책은 이토록 오래 희생양들을 양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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