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내가 가진 <데미안>은 1986년에 초판 인쇄되고 89년의 한글맞춤법 개정에 따라 중판된 고작 2천500원 짜리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시중에 출간된 수많은 판본가운데 그 어떤 것하고도 바꾸고 싶지 않은 나만의 책이다. 목차에 Nust Henri라는 낙서가 쓰여진 이 책이 내 삶에 특별한 거창한 이유까지는 없다. 단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소소한 진실은 이 책이 내 용돈으로 산 첫번째 책 가운데 하나였고, 나의 첫번째 <데미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영민군의 미니홈피에서 <데미안>과 <지와 사랑>에 관한 감상을 읽다가 갑작스레 나의 데미안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나 의외의 발단이어서 나의 모든 행동을 나다운 것으로 너그럽게 인정해주는 친구들에게조차 쉽게 말하지 못했던 그 시작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편집본이 아닌 24편으로 이루어진 진짜 <일리아드>를 사기 위해 서점에 들린 나는(그 유명한 함선의 사열과 방패 묘사까지 들어있는 진짜였다. 지금에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내가 아는 한 90년에는 진짜배기 <일리아드>는 이것 밖에 없었다) 하얀 셔츠에 무릎에 살짝 걸리는 청치마를 입은 내 또래보다 한두 살 연상의 소녀를 보게 되었다. 순간 <참 보기 좋았더라>란 감탄이 떠올랐던 것 같다. 종이봉투에 담아준 <일리아드>를 옆구리에 끼고 그녀가 서있던 서가로 슬금슬금 접근하던 내가 기억 난다.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동선을 유지하면서 이 책 저 책을 뽑아보며 느릿하면서도 꾸준하게 그녀에게 접근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50센티미터 안에 들어섰을 때 난 소녀의 내려다 보는 눈과 마주쳤다. 하지만 소심하고, 부끄러움 많이 타던 당시의 난 무언가 말을 하기 보다는 어색한 행동거지로 그녀가 읽고 있던 것과 같은 제목의 책을 뽑아 들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당시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행동의 한계는 고작 그녀와 같은 책을 읽는 정도였기 때문이다.(사실 이것은 지금도 그렇게 변하지 않는 한계인 것 같다)

아무튼 <데미안>과 <일리아드>를 사온 나를 향해 누이들이 보인 반응은 참으로 다양했다. 큰누이는 겉 넘었다는 핀잔을 주었고, 둘째 누이는 마냥 비웃으며, 막내 누이는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의 난 막 <초한지>와 <삼국지>, <플루타크>를 다 읽고 일리아드에 손을 댔을 무렵이고 당시의 나에게 <데미안>은 솔직히 버거웠다. 놀림에 대한 응수로 억지로 읽긴 했지만 내가 <데미안>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은 오직 ‘카인’ 뿐이었다.

하지만 성장과 함께 해마다 반 장씩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 같다. 청소년기에는 ‘새는 알의 깨고 나온다’에만 눈이 멈췄고 오늘에 이르러서 <데미안>은 맨 마지막장인 ‘종말의 시작’에 멈추어 있다. 어쩌면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다음에는 다시 ‘두 개의 세계’로 되돌아 갈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나는 아직 <데미안>을 다 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데미안>에 대해 느끼는 이런 미진함은 어쩌면 어린 시절 읽은 신문 기사에 근거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데미안>은 성장 소설이며, 읽을 때마다 세상을 더 많이 알아갈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는 한 평론가의 말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데미안> 읽기가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이미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머리 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한 줄의 문장이 나로 하여금 <데미안>은 이렇게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규정 지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읽기도 나쁘지 않다. 평생 판단을 보류한 채 끊임없이 읽어야 할 책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반드시 성경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데미안이 그렇다. 이제는 당시보다 두 배 반이나 나이가 많아 졌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평생 읽을 수 있는 <데미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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