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설계

나에게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된 버릇인지 연원을 알 수는 없으나 대칭성의 엄밀함을 버리지 못하는 이야기에 지루함을 느끼는 못된 버릇이 있다. 더구나 그 대칭성이 복층화를 이루며 하나의 구조를 만들 경우 상황은 한층 심각해 진다. 이런 구조화는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사고의 자유로움을 배우지 못한 고지식한 모범생처럼 딱딱하다. 무엇보다 우리 세대에 있어 대칭성은 이미 균형 잡힌 미덕이기 보다는 갑갑함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런 대칭성이 소설에 적용될 경우 그런 소설은 왕왕 재앙 자체로 돌변하고 만다. 아무리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있어도 소설가 자신이 대칭성의 노예가 되어 구조화를 시도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문학적 재미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매혹을 잃어버린 채 평범하고 재미없는 문자열에 머무르게 된다. 바로 <이중설계>가 그렇다. <이중설계>는 초반부터 견디기 힘든 지루함을 자랑한다. 쌍을 이루는 두 개의 이야기의 발단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다른 소설에 비해 전개까지 이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루한 발단을 두 개나 읽어야 하기 때문에 속된 말로 ‘제대로 된 탄력’을 받기 힘들다. 독서의 윤활유나 다름 없는 몰입의 즐거움 역시 이 책에서는 한참 나중에야 나타난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런 몰입의 즐거움이 찾아오는 순간 대칭성과 복층화 된 구조에 의해 뒷이야기를 쉬이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상한 뒷이야기가 맞아가는 기쁨이 있기는 하지만 이 작은 기쁨마저도 너무나 엉성하며 작위적인 마무리에 의해 쉽게 흩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런 모진 비난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미덕이 하나쯤은 있다. 그것은 소설가와 특정 영역의 전문가 사이에서 이루어진 공동 작업 과정을 추적하는 기쁨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는 어렵지 않게 두 개의 문체를 구분할 수 있고, 그런 구분을 통해서 이 소설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처음 이 소설은 소설가가 생각해 낸 주인공의 캐릭터라이징에 대한 짧은 코멘트와 골격과 배경만 잡힌 시놉시스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이들은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게 되었고 몇 잔의 술잔과 대화 끝에 공공 작업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나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몫이고 특정 영역의 전문가는 세부적인 디테일을 채우고 소설의 본질적인 흐름과 무관한 짧은 이야기를 구성해 내는 정도에서 만족해야만 했을 것이다. 문제는 소설에 관한 전문가가 아닌 특정 영역의 전문가가 소설에 관한 전문가여야 할 소설가보다 더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에 있다.

소설가는 종국에는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두 개의 쌍을 이루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들에게 적절한 현실성과 공감을 불어 넣기에 실패했다. 사실 지나친 애정만큼 캐릭터를 겉돌게 하는데 있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없다. 나르시즘에 빠져 작품을 바라보는 냉정한 눈을 잃어버린 소설가의 행로는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이내 꺼져버리는 ’bonfire of Vanity’와 다름 없다. 좋은 재료를 고르는 안목은 가지고 있지만 재료에 알맞은 조리법과 융통성(ゆとり)을 모르는 사람은 좋은 요리사가 될 수 없다. 소설가 또한 그렇다.

[#M_ etc | less.. | 간만에 서울행을 결정했다. 학생증도 찾아야 하고, 약간의 의무도 수행해야 하며, 만날 친구도 있다. 무엇보다 24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이윤택 연출의 <햄릿>를 보기로 했다. 지기 녀석은 단 둘이 관람하는 연극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 의외가 일상이 된 순간을 한참 전에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_M#]

2 thoughts on “이중설계”

  1.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다만 예의상(?) 물었던 것일세.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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