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초콜릿공장

사람들은 가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다시 읽고 싶어할 때가 있다. 그런 기분에 함몰되는 순간의 지인들은 곧 잘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권해달라고 청하곤 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면 어김없이 나왔던 답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읽어보라는 대답이었다. 사실 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한번 밖에 읽지 않았다. 그것도 1990년 오늘 같은 가을 오후에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초콜릿 공장의 비밀>은 달콤한 맛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향에 관한 소설이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공장에서 흘러나오던 초콜릿향에 대한 묘사와 한 이불을 공유하는 네 명의 노인, 반 기니가 가져다 준 행운이 나에게 남아 있는 전부다. 하지만 초콜릿 한개를 오롯이 먹어보고 싶은 욕구와 처음 맛본 그 달콤한 중독의 유혹을 이보다 더 잘 설명했던 묘사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복권의 존재를 몰랐던 당시에 윌리 윙카의 초대장은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었던가?

하지만 윌리 웡카의 캐릭터는 당시 내 마음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의 시니컬한 성격과 과장된 징벌도 초콜릿의 향에 대한 묘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소설의 맨 마지막장에서 윙카의 시종일관 무뚝뚝하고, 냉혹한 행동과 성격에 일관성이 없어졌던 문장이 돌연 등장했던 것에 의아해 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그때서야 난 중절모를 쓴 나이든 영국 신사의 이미지에서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주인공처럼 조로증에 걸려버린 늙은 청년을 잡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초콜릿으로 만든 강 앞에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막 십대에 접어든 소년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문이기 때문이다.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내가 읽었던, 혹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다른 느낌의 영화였다. 끊임없이 비가 내렸던 지난 여름의 어느날 읽었던 리뷰에 등장했던 중세적 괴담이란 묘사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속을 차지했다. 내가 읽었던 달콤한 유혹이 윌리 윙카라는 캐릭터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팀 버튼의 불우한 상상력 속에서 초콜릿의 특유의 향은 고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반 기니의 행운이, 가난한 소년의 마음과 초콜릿 공장이라는 환상적인 공간이 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초콜릿쟁이인 윌리뿐이다. 소설 전반부의 찰리에 대한 묘사는 착한 아이에 대한 고전적인 묘사만이 아니다. 윌리 윙카의 기행을 마무리 짓는 상대역이자, 잔혹한 중세적 징벌에 대한 괴담을 다소 가볍게 만드는 균형추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찰리다. 하지만 스타 시스템과 산업화된 영화 제작은 더 이상 캐릭터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영원한 청년인 조니 뎁과 악동 팀 버튼, 그리고 초콜릿 공장이라는 마케팅 이슈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상업성 속에 문장이 만들어 낸 가장 잔혹하면서도 달콤한 위대한 상상력 하나가 쇠잔해 버렸다.

읽혀지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는 사실성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발화와 침묵 사이에도 비슷한 관계가 성립한다. 문장은 이토록 끔찍한 징벌이 과장된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허구가 실제가 될 때 발생하는 충격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팀 버튼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10월에 개봉할 그의 새로운 영화인 ‘corpse bride’를 보려는 내 심리가 우습기는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는 초콜릿의 또 다른 맛인 쌉살함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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