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05 Fall)

1.
가끔 병원에 갈 때면 스무 살에 내렸던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확신으로 의기양양해 하곤 한다. 어떤 친구들은 혹 나를 아는 어떤 이들은 당시의 내 선택이 편한 길을 놔두고 불확실성의 세계로 뛰어든 철없는 행동이라 평가했지만 병원에 갈 때마다 이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해준 당시의 선택에 찬사를 보낸다. 사실 난 아픈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두렵다. 병자를 바라보는 것이 내 평생의 업이었다면 난 그런 내 삶의 무게를 한순간도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2.
사람마다 원하는 배우자상이 있다고 한다. 자발적 독신증후군에 감염된 주제에 친구들의 배우자상은 생각보다 명확하다. 그런 친구들에게 <정치적 성향이 같을 것, 종교에 무관심할 것, 애완 동물을 키우지 말 것>이라는 내 배우자상을 이야기하니 다들 자지러진다. 그런 것 말고 좀 진지한 배우자상을 가져보라고 점잖게 충고한다. 하지만 서시 같은 미인이라도 날마다 신문을 보며 언쟁을 벌이고, 어떤 분쟁보다 많은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는 종교 전쟁을 벌이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제한된 애정과 관심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도 아닌 동물과 치졸한 경쟁을 벌이는 것만큼은 절대 사절이다.

3.
요즘 들어 마시는 살구향 홍차는 세 해 전 나를 설레이게 만들었던 그 향과 맛이 나지 않는다. 그 향과 맛을 머리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재현할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이다. 불완전한 기억에 추억을 맡기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또 어느날 우연히 그 향과 맛을 되찾은 순간의 위험한 표정을 타인에게 들키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다. 결국 이렇게 또 하나를 잃어버리는구나!

4,
이제 슬슬 인사말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어떤 인사말이 가장 담담하면서도 절제된 인상을 남길지 지겨운 복도를 걸으며 보이는 하늘 너머로 구상중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사말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치졸한 짓이다. 반기지도 않을 인사말을 만들어 내니라 복도를 오가는 내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아! 예전의 난 친구들이 인사말을 고민하기 전에 기막힌 인사말을 먼저 선물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 빈궁한 재주마저 떨어진 모양이다.

5.
중용은 빛이 나지 않지만 중용을 잃은 태도만큼 꼴사나운 것은 없다. 멋진 몸매와 옷 매무새는 아니더라도 꼴사납지는 말자. 그것은 주장을 위해 논거를 꾸미는 것이나 이상에 취해 현실을 부정하는 사보나롤라나 다를 바 없다.

6.
일어나자 마자 경기둔화가 예상된다는 그린스펀의 발표가 뉴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한편으로는 초여름부터 지리하게 이어졌던 논쟁에서 그가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소식으로도 들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부동산 버블이 붕괴될 경우 경기 둔화는 급격한 경기 후퇴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제 막 지표상의 반전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다지 유쾌한 소식은 아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중요도가 높지 않은 문제로 내정에 집중할 정치력을 낭비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최악의 예측가운데 하나다. 덴트 따위의 전문가들이 일삼는 혹세무민을 믿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믿고 싶었는데 역시 망언의 말로는 항상 같다.

[#M_ 7. | less.. |
가을에 사들인 책들과 눈과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한 장의 사진.



8. 그리고 2년전 오늘
가장 많은 전화를 받았던 날.
한편으로는 매우 씁쓸했던 날.
마지막으로 파파이스에 들린 날.
왼쪽 팔목을 차지하고 있는 시계를 막내 누이로부터 선물 받은 날.
‘기억력 좋은 남자’와 ‘잠재적 가능성 0%’라는 구절이 내 마음을 들쑤셨던 날.

마지막으로 황량하던 막간극이 끝난 날.
_M#]

4 thoughts on “어느 가을날(’05 Fall)”

  1. 책을 한번에 정말 많이 사시네요. 우와!! 복무기간이 끝난 모양이네요. (아니면 할 수 없니만 맞다면) 앞으로 희망하시는 것 잘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2. 지금 거주하고 있는 궁벽한 시골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이 너무 많거든요. 적립금 정책의 노예化가 진행되면서 조금 과하게 구매하는 것 같아요. 복무기간은 아직 조금 더 남았답니다. 기분상으로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지만요. 참! 격려 감사드립니다.

  3. 입소날이 오늘이었던가? 난 17일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튼 자네가 올라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네.
    전화통화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ㅋㅋㅋ

  4. 디플레이션과 디스인플레이션은 헷갈려도 이런 것은 헷갈리지 않는다고. 시험 준비는 잘하고 있는가? 한달쯤 뒤에는 예의 사대 벤치 뒤에 앉아 겨울이 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겠구먼. 따뜻한 캔으로 손을 녹이면서 SPSP에 관한 주저리주저리를 늘어놓을 것이 뻔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참. YB군마저 금연 열풍에 동참했다네. 벌써 두달이 넘었다더군. 그 녀석이 유혹에 얼마나 약한지 알고 있다면 이 소식은 자네 역시 금연에 성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충분한 논거라고 봐. 비용 측면에서 담배의 해악을 부르짖는 녀석이 과거에 비용대효용으로 담배를 옹호했다는 것이 기억나서 조금 많이 귀엽기는 했지만 이젠 개인적 기호품 영역을 넘어선 자존심 걸린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해. 그 녀석도 그러더라고 ‘이것은 의지의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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