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성

남은 사랑니를 모두 발치한 기념으로 책장에 쌓인 소설 가운데 하나를 골랐다. 사실 당초 의도는 <붉은 브라질>을 읽으려던 것이었으나 마취가 풀린 이후 은은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통증 속에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소설을 읽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핀커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가볍게 항의하는 차원에서 파묵의 <하얀성>을 꺼내 들었다.

<하얀성>은 짧지만 꽤 재미난 소설이다. 그의 출세작인 <내 이름은 빨강>과 비교하자면 묘사에 담긴 힘과 정열은 부족한 편이나 구성의 조화는 휠씬 돋보인다.-사견을 밝히자면 눈멈에 대한 그의 묘사보다 더 강렬한 묘사를 현대 소설에서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다- 무엇보다 끝까지 읽었음에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절망적인 결론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예민한 독자라도 이 소설 속에서 진실을 건져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장을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구분할 수 없는 ‘그’와 ‘호자’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읽는 기준으로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터키의 특수성을 꼽는다. 터키의 이중성을 토대로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와 문화를 조망함으로써 소설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는 설명이 대세이다. 하지만 난 파묵의 소설을 읽을 때 이런 이중성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쪽이 더 마음에 든다. 이중성과 그들의 고민을 인정한 채 소설을 읽게 되면 우리는 그가 보여주려는 진실보다 우리가 믿으려는 진실을 먼저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교는 아니지만 <하얀성>과 가장 유사한 소설을 꼽으라면 에코의 <바우돌리노>가 생각난다. 두 소설은 서로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나 진술이 이루어지는 곳은 콘스탄티노플(혹은 이스탄불)로 같으며 무엇보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어디까지가 거짓인가?’를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하게 되어버리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부정이라는 숙명을 지닌 진실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 있다. 오늘 내가 결론지은 진실이 한낱 추정에 불과하며 내일은 거짓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 thoughts on “하얀성”

  1. 찬익! 엊그제 문득 왔다가 이 포스트보고
    나도 방금막 하얀성을 다 읽었다우 흐흐

    말년. 여유로움만 콕콕 취하면서 지내기를 : )

  2. 시험은 다 끝난 것이야? 한가할 때 꼭 집에 내려오라고. 곧 있으면 나도 서울행일테니 더 늦기 전에 낙엽지는 가을의 스산함을 즐기며 이 골목 저 골목 산책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이 소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겠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믿기에는, 아라비안 나이트같은 하나의 야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마음에 남긴 잔상이 꽤 크거든.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