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icus verus est rara avis

1.
가을에는 까닭 모를 서글픔이 묻어 난다. 이유 없이 혹은 명확한 대상조차 정해지지 않은 채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고 싶고, 낯선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런 기분에 마냥 취해 있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가을 특유의 외로움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칫 일상의 안정감을 잃어버릴 우려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현명한 조언보다는 달콤한 유혹에 더 쉽게 이끌린다. 훌쩍 기차에 올라 여행을 떠나고 싶고 몽롱한 음악을 들으며 가슴저린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아니 사랑한다는 말에 배가 고프다. 누군가 사랑한다는 말을 포만감이 들 정도로 남발해 주었으면 좋겠다. 설령 그것이 꿈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의 난 이런 소소한 감상과 전혀 다른 일상을 살아간다. 위클리 스케쥴러에는 해야 할 일들이 빽빽하게 차 있고 잠마저 온전한 휴식이 아니다. 어쩌면 이렇게 바쁘게 보내는 일상은 외롭지 않다는 자기 암시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 말대로 사랑을 찾아 길고 지리한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편이 휠씬 나은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해마다 가을은 다시 온다. 그리고 운 나쁘게도 해마다 외로움도 나를 다시 찾는다. 언덕 위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성당 옆의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던 스무살 가을의 외로움이나 궁벽한 이곳에서의 가을이나 5년이란 시간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난 애써 겨울을 기다린다. 겨울이 되면 이런 외로움이 또 다시 잊혀질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 없이 바쁜 일상과 친구들 틈에서 짐짓 외로움 따위는 모르는 척 허세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의 냉혹함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예전에는 냉혹함을 하나의 훈장쯤으로 여겼던 철없는 시기도 있었는데 요즘은 스스로의 냉혹함이 버겁다. 왜 예전처럼 다정한 어조로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노력의 값어치만큼 되돌려 받고 싶은 지금의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시를 짓고 화장을 하는 것’은 엄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밉다.

하지만 적당한 냉혹함이 현대인의 미덕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모두가 냉혹한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방법은 나 역시 초지일관 냉혹함을 잃지 않는 것이라는 울고 싶은 결론도 안다. 하지만 늦은 가을밤 짧은 메시지에 담긴 말 못할 사연을, 부주의로 잃어버린 상봉점을, 다같이 바쁜 일상에 묻혀 마음으로만 인사를 건네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다 알고 있다고, 그리워 하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힘내라는 말뿐이라고 이렇게 변명을 쓰는 것 빼고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2 thoughts on “Amicus verus est rara avis”

  1. 진실로 냉혹한 사람이라면 아마 계절을 타지도 않을테지요. 계절에 감응했다는 건 냉철한 이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에도 늘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거에요. 가을이 건네주는 ‘한없이 외로워질 수 있는 기회’란 것은 마트에서 오후 일곱시마다 열리는 깜짝 세일 같은 건지도 몰라요.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외로움을 한껏 만끽해보는 건 어떠세요. 저는 때로 스스로를 고독의 극한지점으로 몰아붙일 때마다 은밀한 자학의 쾌감을 맛보기도 하는 걸요^^

  2. 고독의 임계점에서 느끼는 자학의 쾌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요. 저 역시 종종 그것을 즐겼거든요. 그때는 계절을 타며 즐길뿐 아니라 조금만 한가해져도 바로 그 임계점으로 스스로를 슬슬 몰아갔던 것 같아요.

    아무튼 7시 깜짝 세일을 놓치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자의 역할과 거리가 멀테니까요. morisot님의 말처럼 ‘한없이 외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겠어요.(설령 7시 깜짝 세일을 맞추기 어렵다 해도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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