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urprise Sale

1.
요즘의 난 소위 말년이라고 불리는 시간을 유유자적 즐기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을 등으로 즐기며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넓은 책상에는 궁벽한 이곳에서의 삶을 함께한 아이팟이 외롭게 굴러 다니고, 카모마일 한 잔과 장정이 닳은 거시경제학이 정물처럼 놓여 있다. 피아노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바흐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듣는다.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폴로 스포츠 점퍼를 입고 유난히 기장이 긴 연한 하늘색 체크 무늬 셔츠의 깃을 빳빳하게 세워 본다. 동공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점심에는 디오니게스처럼 햇살을 벗삼아 짧은 낮잠을 잔다. 지리 했던 은둔의 마지막 초상치고는 꽤 멋지다고 자화자찬 해본다.

2.
경건한 마음으로 신에게 감사하는 그의 글을 읽고는 신은 너를 포용할지 몰라도 운명에 희롱 당하고, 풍문에 휩쓸리는 난 너의 회피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성격 나쁜 탕아처럼 혼자 읊조렸다. 우리가 배워야만 했던 것은 아니 실제로 배운 것은 최선이 모든 액운을 막아주는 부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최선이란 가장 유용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최선이란 방패 뒤에 숨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비겁이다. 그는 신의 품 속에서 모든 것을 과거로 묻을 수 있겠지만 신을 믿지 않는 나는 그마저 할 수 없다. 난 다음 금요일이 두렵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혹독한 진실이 한 두개쯤 있는 법이기에.

3.
다시 휴게실이다. 창 밖이 소란스럽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감을 따는 흥겨운 목소리다. 난 이들의 비효율성과 고루함, 편벽한 습성을 미워했지만 그만큼 이들의 쉽게 상처 입는 여린 마음과 복잡하지 않은 단순함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쩌면 조악한 자판기 커피를 끊임 없이 권하고 그것을 거절할 때마다 토라지는 그 표정을 남몰래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는 말이 말보다는 몸이 먼저 나가는 이들이 펼쳐나가는 희비극을 때로는 흥미롭게 때로는 짜증스럽게 바라보는 일도 어느새 마지막이 가까워 오고 있다.

4.
십년을 훌쩍 넘긴 친구와 더 이상 부연할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구멍 가게에서 바나나 우유를 마셨다. 친구는 가정법에 대한 열변을 토하고 있고, 난 건성으로 동사 원형을 쓰는 가정법 현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맞장구를 치며 벽에 붙은 세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진지한 녀석의 표정은 아홉해 전 이즈음 고등학교 입시 문제로 고민하던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본다. 휘적 걷는 걸음걸이조차 그대로인 녀석이지만 이번에 떠날 때에는 꽤 오랫동안 못 보게 될 것 같다.

5.
비가 내릴 것 같은 찌푸린 날씨다. 동전 저금통의 비효율적 공간배치를 성토하던 누이에게 아버지와 난 화폐의 유통 속도와 본원 통화의 감소, 인플레이션 조세, 주조 비용 등을 근거로 동전 저금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사실 선생님인 누이로서는 조금 황당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동전 저축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하나?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절대 반지가 소설에나 존재하듯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저축하는 버릇이 가져다 주는 이익와 동전의 보유 비용이라는 손실을 합리적으로 평가해 보아야 한다.(솔로우에 따르면 저축율이 최적 자본량을 결정한다지만 소득은 단지 소비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삼선의 이론을 도입해 정보 비용을 고려하면 어떤 것이든 뜻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알 수 없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누이를 타박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한다는 희한한 결론까지 연역해 낼 수 있다.

6.
결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문제집을 풀고 있는 나를 낚아챈 친구 녀석은 매주 만원의 행복을 찍고 있는 헐벗은 지갑을 벗겨간다. 결국 500원짜리 동전 하나와 100원 짜리 동전 두개 몇 개의 캐러멜이 수중에 남은 전부다.

7.
드디어 나에게도 마음껏 심술을 부릴 기회가 찾아왔다. 프로포즈를 위해 한 시간만 육교에 현수막을 게시하면 안되냐는 질문에 무슨법 몇조, 시행령 몇조, 시조례 몇조를 들먹이며 과태료 25만원이라고 나직하게 말해주었다. 그치는 나의 감각 없음을 야박하게 생각하겠지만 프로포즈의 기대감으로 들뜬 목소리를 듣는 가련한 총각 마음에는 그치가 더 야박하다.

etc
하루 종일 오타를 그대로 두었는데 아무도 비웃지 않는다. 다들 바쁜 건가?

6 thoughts on “A Surprise Sale”

  1. 내가 막 비웃으려던 참이야.
    그리고 동전 모아서 맛난 거 사먹을 때 넌 국물도 없을 줄 알아.

  2. 내가 저금통 깨자고 유혹하기 전에 누나가 혼자 그것을 깰 수 있을 것 같아? 지금까지의 전례를 볼 때 이 저금통도 내가 이런 것을 놔두어서 뭐해하는 괴변을 늘어 놓아야 누나가 설득 당해 깨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국물도 없다는 것은 실효성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해.(초콜릿 한 상자 어때?)

  3. 대화가 결코 드물었던 것은 아니라 생각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있군.ㅋ

    지난 주말은 즐겁게 보냈다.
    사소한 일들이 몇가지 있었고, 그 정도로도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었어. 간만에 통화하면 즐거울 듯. 단, 자네의 이야기가 많다면 미뤄지겠지만 말야.ㅋㅋ

  4. 이번 금요일에는 서울에 갈 듯 싶어. 그곳에 관련된 모임으로.

    사소한 일로도 즐거웠다면 JY씨와 관련된 일이겠구먼. 혼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름대로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당장 전화하겠네.

  5.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은데 이제서야 난 자네가 좋아하는 비례적 척도를 알게 된 것일까? 오래 전에 알았더라면 우리의 삶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확실히 다른 궤도를 타고 갔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미안 미안.

    아무튼 ‘기분 좋았던 유쾌한 대화’의 디테일을 재구성하라는 나의 놀림은 잊어주게나. 그런 것들은 이유를 탐구할 수록 스스로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일테니까. 하지만 슬쩍 본 것만으로도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어. 다만 특별히 불만스럽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만족스러운 것을 찾지도 못한 정체 상태인 것 같아 보여. 반칙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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