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

1.
누이가 리코더 합주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을 때면 난 리코더 연주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누이는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리코더 합주 정도는 해야 한다고 되려 나에게 핀잔을 준다. 사실을 밝히자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까닭은 더 이상 리코더 합주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피리를 불면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변한다는 알키비아데스의 신념이 무의식중에 나에게도 전이되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해보지만 실상은 음치에 박치까지 겸한 음악과 거리가 먼 위인이 나였다는 설명이 옳다.


2.
M님의 글을 읽다가 주말 오전을 흘려 보내곤 했던 산책이 떠올랐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홀로인 상태를 즐겼던 그 순간이 바람 냄새, 불투명한 햇살의 추억과 함께 되살아 났다. 지난 9월에 P양에게 길을 알려준다는 핑계를 대며 슬며시 지나쳤던 드라이브 코스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음악에 취해 길을 걷다 걸음이 머물곤 했던 찻집들은 지금쯤 누구의 추억 속에 스며들어 가고 있을 지 잠시 궁금해 본다. 애플티를 마시며 짧은 에세이와 소설을 읽던 그때의 기분이 어제처럼 마음 속에 흘러 넘치는데 벌써 오래 전 이야기다.

3.
우리집에는 타로는 오컬트가 아니라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굳게 믿는 과년한 처자가 한 명 있다. 그녀의 궤변에 넘어가 사이비 신자가 되어비린 나 역시 daily reading을 즐기며 적당히 복잡한 문제 앞에서는 카드를 뽑아 무의식을 헤아려 본다. 가끔은 남몰래 연애운을 점치기도 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쾌한 결과가 나올까 두려워 카드를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타로의 정확성에는 내심 놀라곤 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느낌들이 카드 한 장에 응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경험이 만들어 낸 78장의 과학이란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K군을 위한 카드. 난 오른쪽 카드가 나오기를 바랬는데 왼쪽 카드가 나왔다. 지금까지의 우리 관계로 볼 때 왼쪽은 다소 진지하다.

4.
사람은 저마다의 악취미가 한두개쯤 있다고 한다. 난 정도가 심한 편이라서 악취미가 흘러 넘치는 편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으로 과거에 흠모했던 그녀들을 숨기는 나쁜 버릇이다. 가령 <표절>에 등장하는 야스미나나 <숨은 꽃>에 등장하는 요시에, <내 이름은 빨강>에 등장하는 세큐레 같은 이름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악취미에는 비싼 대가가 따른다. 고정된 소설 속의 캐릭터와 다르게 그녀들은 끊임 없이 변모하고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와의 관계 역시 시시각각 틀어지곤 한다. 그리고는 이내 어떤 유사점도 없는 종막을 향해 질주한다. 결국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를 느끼며 안타까워 하는 것은 순전히 나만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다.

6 thoughts on “막간극”

  1. 잘 지내나요 ? 아직 내가 보낸 편지가 당신의 편지통에 더 많이 남아있기에.. 때론 심통이 난답니다. 어떤 유사점도 없는 종막에 이르기 전에, 우리의 조그만 우정이 그대로 남기를 바라기에.. 당신의 안부를 물어요.. 여전히 크리스마스의 이브를 도서관에서 보낼 작정인가요 ? ^.^

  2. 저도 안부를 물어요. 잘 지내고 있나요? 작년처럼 크리스마스 트리를 놓아준다면 도서관도 꽤나 아늑한 분위기일텐데 올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사실 아직 아무런 계획도 세워두지 않았어요. 아직은 11월이잖아요?

  3. SMTP는 끝낸 거야? 방금 주문한 가방이 도착했는데 invoice에 장난을 쳐놨어. 이런 센스는 우리 나라에서만 부리는 건줄 알았는데 말이야.

  4. 그럴 때는 ‘정직한 젊은이로군’ 하고 말하는 거야. 감기 걸렸다며? 내일 명년 구정 기차표 예약하는 거나 잊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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