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니발을 이겼는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플루타르크의 <비교열전>에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유명세를 달리고 있음에도 별도의 평전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 둘 있다. 바로 한니발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비교열전>을 읽으며 이런 특이한 상황을 쉽게 간과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데 직접적으로 전기의 주인공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촘촘하게 녹아 있기 때문에 별도의 전기가 존재하지 않아도 이들의 삶을 충분히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별도의 전기를 읽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문헌학적으로는 우리가 현재 <비교열전> 혹은 <영웅전>이라 부르는 텍스트가 원본과 매우 다른 형태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비교열전답게 플루타르크는 로마의 인물 한 사람과 그리스의 인물 한 사람을 비교하는 짧은 글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 짧은 글이 남아 있는 경우는 반반이다. 게다가 다른 저술의 언급을 통해 <비교열전>에 실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들 역시 현재보다는 많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인물 탐구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플루타르크가 저술한 개별 평전이 없다는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이 무서운 양반의 필력에 휘청거리는 일없이 제 나름의 像을 소신껏 제시할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니발과 스키피오를 다룬 책은 꽤 많은 편이다. 다른 인물에 비해 각색된 역사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빈번하다. 하지만 대개의 작가들은 누가 더 뛰어난 인물이냐는 책 속의 물음에는 얄궂게도 운명의 신에게 조롱당한 한니발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준다. 자마 전투의 승자 아프라카누스에게 남겨진 것은 ‘배은망덕한 조국’이지만 한니발에게는 그 고향조차 남겨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아무튼 한니발에게 우호적인 대개의 책들 틈에서 스키피오의 위상 변화를 시도한 책이 한 권 있다. 전략사가 혹은 전략론으로 유명한 리델 하트의 저술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 기갑전의 창시자 구데리안보다 먼저 기갑 전력의 집중화를 통한 기갑군의 편성을 주장한 사실보다 그가 이 책의 저자란 사실이 더 마음에 들 정도로 이 책은 리얼하게 고대 세계의 전투를 묘사하고 있으며 스키피오의 제너럴쉽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특징은 스페인에서 벌어진 스키피오의 군사 행동의 단초가 자마 전투의 승리로 이어지게 된 발전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는데 있다. 게다가 마라톤 전투 이후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경보병이 스키피오에 의해 전력화된 과정에 대한 통찰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책과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2권>을 비교해 보면 후자쪽이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가벼운 기분으로 적어 내려간 ‘짜깁기’와 균형 감각을 잃지 않은 체계적인 글 사이의 비교는 온당하지 않다. 극적 재미를 위해서라면 후자가 더 나은 선택이지만 그 대단한 한니발을 무찌른 한 남자의 내적 발전상과 과장이 섞이지 않은 차가움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전자를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M_ P.S. | less.. |
고3 봄 무렵. 야자 시간에 바나나 우유를 물고 한참을 걸어 서점에 도착한 나는 손에 잡힌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다음날 하루를의 여가를 모두 여기에 쏟아 부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이제는 절판되어 도서관에서나 간혹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되었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에 관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지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것을 내주게 된다. 이 포스트는 1999년에 작성된 것이며 일찍이 재활용함에 던져버린 그 시기 글가운데 살아남은 얼마되지 않은 잔존물 가운데 하나다.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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