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05 冬)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이야기에 담긴 종교적 상징성에 취해 있던 내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목격한 것은 수북하게 쌓인 눈이었다. 전국적으로는 조금 늦은 첫눈이지만 이 지방에서는 되려 조금은 이른 첫눈이다. 하지만 소복하게 쌓이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첫눈이 내리는 시기같은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눈에는 눈과 관련된 모든 추억을 상기시키는 놀라운 마법이 스며 있다.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한결 같은 영향을 미치는 마법의 성격을 더 자세하게 나열하는 것처럼 시간 낭비는 없으리라.

태어나 처음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던 집앞 뜰과 눈때문에 내린 첫번째 휴교령, 눈 내리는 날 이면 스쿨버스에서 내려 눈길을 뚫고 산 속으로 1.5킬로미터나 걸어가야 했던 학교같은 것이 생각난다. 종이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긴눈썹 사이에 작은 물방울이 되어 녹아버린 눈의 흔적 따위를 바라보던 기쁨도 생생하다. 머리와 어깨에 내려 앉은 눈을 털어주던 손길의 당황스러움과 22살 겨울 충무로의 어느 좁은 골목길에서 당한 봉변의 아찔함 같은 것도 떠오른다. 반쯤 술에 취해 눈무더기를 던졌던 일도, 가지마다 내려 앉은 눈의 무게로 위태로운 나무 밑에서 나를 기다리던 친구에게 선사했던 아찔한 눈사태도 떠오른다.

늦은밤 핸드폰이 울린다. 10시가 넘어서 통화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우리로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몽롱한 목소리는 첫눈이 오는 한밤중에 다정한 연인이 아닌 잔소리쟁이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신세가 궁색하다고 말한다. 그의 궁색이 나의 궁색처럼 여겨졌기에 유리창을 때리는 바람처럼 잠시 소슬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대화는 추억의 바다를 항행하는 선원들의 목소리처럼 주변머리 없는 문장을 주어담기 시작한다. 그리곤 이내 설령 연인이 있었더 하더라도 이 시간에 전화를 걸지는 못했을 거라고 위로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친구의 말대로 연인이 없는 겨울은 심정적으로 궁핍하다. 눈 내리는 겨울밤의 산책과 키스는 연인들의 독점물이기에 우리는 감히 현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늦은밤 재미난 책을 읽으며 첫눈을 바라보는 일도, 노란 나트륨에 물든 눈의 군무를 감상하는 일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따뜻한 핫초쿄를 마시며 아이도 어른도 아닌 청년들이 나누는 수다의 재미도, 첫눈에 얽힌 에피소드를 나누며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일도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첫눈이 내린다. 나의 첫눈은 추억을 만드는 시간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반추하는 시간이 되어버렸지만 이 하늘 어딘가에서 어떤 이들은 유쾌한 기분으로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사람 좋게 웃어본다.

P.S.
첫눈이 내릴 때면 읽는 은비령은 며칠 전에 이미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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