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

소설의 영화화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그 반가움 속에는 약간의 꺼림직함이 함께 녹아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빈곤한 상상력의 한계를 명확하게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하나이고, 타인의 상상력에 의한 오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머지 까닭이다. 하지만 문제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영상 매체가 지니는 쉬운 접근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꽃을 피우기 전에 먼저 원작을 읽으면 된다는 해결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솔직히 근본적인 해결책인지는 자신이 없다. 반지의 제왕을 생각해 보라. 케이블에서 반복적으로 방영되는 동안 난 처음 소설을 읽으며 힘겹게 상상했던 수많은 기억들을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의 몸짓과 화려한 전투신에 거의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의 ‘나니아’ 탐험은 영화화라는 상업적 결정에 떠밀려 당초 예정보다는 빨리, 정상적인 경우보다는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변명할 꺼리는 충분하다. 어린 시절 <나니아 연대기>는 <사자와 마녀>라는 제목으로 연대기 속에 포함된 단편 하나만 소개되었고, 당시의 나는 벽장 속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란 소재보다는 역사 소설이나 고전이 되기에 충분한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책들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금단의 열매를 맛본 후에 아이들의 입맛에나 맞는 덜 자극적인 이야기에 매료되는 일이란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프렌치 키스를 나눈 뒤에는 뺨에 하는 키스를 깊은 애정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니나 연대기>를 보고 읽고 난 지금 시점에서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감상은 금단의 열매를 맛보기 전에 왜 이 책을 먼저 읽지 않았던가 하는 후회 뿐이다. 사실이 상상력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한 어른이 되면 ‘위대한 사자 아슬란’ 이란 문장을 읽으며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고, ‘바다 제왕의 아들’ 이란 문장에서 유전적 돌연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겔리온선이 존재하는 세계에 화포가 없는 것은 넌센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고작 몇 십, 몇 백이 등장하는 전투에서는 어떤 박진감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나니아 세계를 한낱 꿈이나 거짓말 정도로 치부하게 되어버린 수잔처럼 사실이 상상력을 압도하게 된 나를 스치는 어떤 단어들도 환상적인 울림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하지만 실망은 조금 이르다. 상상력을 잃어버린 어른이 된 대가로 우리는 ‘이야기’라는 소설의 구조적 양식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다. 하나의 상상이 씨줄이 되고, 씨줄에서 날줄이 나와 복잡한 능직이 되는 과정을 바라보며 우리는 놀라운 종교적 상징성과 소설가라는 명망있는 직함보다는 재치있는 이야기꾼에 가까운 루이스와 조우하게 된다. 이야기는 해를 거듭해 가며 정교해지며, 보다 넓은 상징성과 은유로 반짝 거린다. 환상은 사라졌지만 놀라울만큼 아름다운 묘사가 가슴을 적신다. 루이스의 묘사에는 단어의 빼어남에서 느껴지는 문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묘사 속에 담긴 호흡에서 비롯되는 설명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있다.

게다가 상상력 보다 사실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는 소설의 창작 과정 역시 역으로 되집어 갈 수 있다. <나니아 연대기>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세심한 계획아래 쓰여진 소설이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기본으로 삼고 점차 이야기축을 확장시켜 나가며 한 세계의 시작과 종말을 그리고 있다. 또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 아니 세계 자체가 확장되고 변화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위대한 사자 아슬란이 나니아를 창조한 것처럼 루이스는 단 한번의 발상 전환을 통해 ‘언어’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만약 내 전공이 영문학이었다먄 그리고 졸업 논문을 써야 한다면-현재의 내 전공과 우리 학교에서는 졸업 논문 제도가 폐지되었다- <나니아 연대기>는 소설 작법이 캐릭터와 복선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되었을 것 같다. 각각의 이야기는 놀랄만큼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만 의도한 연관성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훗날의 창작 과정에서 연관성을 획득하게 된 소재를 구분하는 작업은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다. 또 창작 과정을 역으로 되집어 보면서 체계적인 창작과 비체계적 창작인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재미 또한 남다르다.

끝으로 루이스와 톨킨을 비교해 보자면 이들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꽤 어리석은 짓이다.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가 <반지의 제왕>이 창작되는데 촉매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니지만 두 작품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네 귀가 맞지 않다. 물론 소설의 스케일 면에서는 <반지의 제왕>이 조금 더 크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세계 3대 환상 문학 작품으로 공인되는 것이 당연할 만큼 잘 된 소설들이다. 하지만 두 작품에는 같은 가치관이더라도 다른 층위의 태도와 다른 방향의 예술적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만 그것을 그려내는 방법과 시각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만약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난 톨킨보다는 루이스를 먼저 권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니아 연대기>가 아동 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어서가 아니다.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 여백보다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보다 큰 관심을 쏟아 붇고 있기에 아이들이라면 의당 알아챌 수 있는 상징성과 그 의미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내가 ‘상징성’이라는 두리 뭉실한 표현으로 의제한 의미를 내 아이들의 입을 빌려 듣고 싶다. 나의 <나니아 연대기> 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무 늦게 시작한 까닭으로 남들이라면 이쯤에서 읽기를 끝마쳤을 시간에 난 겨우 절반쯤 페이지를 넘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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