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夜

1.
점심을 먹고 수업에 들어가기 전의 틈을 이용하여 복학생들의 만담이 이어졌다. 아직 소년이었던 시기의 우리와 다르게 대화는 노골적이고 원색적이었지만 그만큼 진솔함이 녹아 있었다. 묵언계라는 아직 어렸던 당시의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제약에서 벗어난 우리는 거침이 없었고 거침 없는 대화는 특별한 재미를 선사했다. 기억에서 완벽하게 지워졌다고 믿었던 시기가 복원되는 힘은 늘 놀랍다. 영민한 녀석들의 기억 한구석에 쌓여 있던 단편들이 결합되면서 만들어 내는 하나의 삶은 늘 놀라운 것 되곤 한다.

2.
지기인 wc군이 소개팅을 했다. 전에는 결코 보여주지 않았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은 연말에 늘어 놓은 잔소리의 일조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사랑의 희망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속절없음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야밤의 군것질을 위해 3분 거리를 걸어서 방문했는데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전화할 적절한 타이밍을 놓쳤다는 그 안타까운 표정만큼은 처음 보았다. 녀석이나 나나 현대인답지 않게 10시를 늦은 시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분명 편벽한 습성일테지만 편벽한 습성을 따라야 마음이 편한 것은 비단 우리의 탓이 아니다. 무엇보다 헤어진 뒤에도 아이팟이 필요없을 정도로 즐거웠다는 녀석의 인용은 억장이 무너질 정도의 황당함을 선사했지만 친구의 행복은 곧 나의 즐거움일테니 이쯤에서 눈을 질끈 감아야겠다.

3.
복학을 하기 전 십년을 훌쩍 넘은 친구인 L군은 wc군과 나를 보며 한 녀석이 자발적 독신증후군을 탈출해야 다른 녀석도 탈출하게 될 것이란 뜬금없는 소리를 던졌다. 최모의 변심 아닌 변심을 보고 있노라니 녀석의 말이 어쩐지 잘 들어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말부터 연초까지 드문드문 들어왔던 매력적인 제안들을 공부를 핑계로 거절한 것이 슬슬 후회가 된다. 최모의 변심 아닌 변심은 나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세태에 순응하는 것과 한층 고립적인 은둔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 하지만 나에게는 서푼짜리 자존심이 있다. 현재의 기쁨도 중요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게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다면 값 치루기에 인색해서는 안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4.
간만에 셔츠와 바지를 사들였다. 어느 사이에 바지는 골반의 지근거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왼쪽 안감 단추가 사라져 있었다. 늘 입는 브랜드의 바지였기에 당황스러움은 배가 된다. 결국 허리 주름이 없는 특이한 면바지에 안착했다. 그나마 이것이 길이나 왼쪽 안감 단추의 존재로 가장 편안했다. 하지만 초콜릿빛의 셔츠와 진청색 스트라이프는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오늘 쇼핑의 월척은 따로 있었다. 짝을 잊어버린 장갑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내고 장만한 멋진 디자인의 장갑이 그것이다. 커다란 손을 깊숙히 감싸주는 편안함과 가죽의 단단함이 결합된 여태 본 최고의 장갑이다.

친구는 장갑없이는 하루도 겨울을 견디지 못했던 내가 장갑을 끼지 않는 것을 늘 의아해 하며 손잡아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냐며 나를 놀려 댔지만 실상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놓쳐버린 사람을 잊는 최선의 길은 새로운 만남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잃어버린 애장품에 대한 아쉬움은 새로운 애장품 밖에 없다. 사랑 역시 그렇다. 후회스런 사랑을 대신할 것은 만족스런 새 사랑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짝을 잃어버린 장갑에 대한 교훈은 항상 유용하다.

5.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를 못생긴 코를 지닌 시라노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스스로가 못생겼다고 주장하는 코와 함께 세상이 이해주지 못하는 천재성이 숨겨져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시라노에게 평생의 사랑이 존재했듯 못생긴 코의 당신도 사랑할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통찰이 아니다. 이런 통찰은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과 다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저 스스로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만 생각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6.
오늘은 십이야이다. 십이야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십이야>에 대한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나에게는 아직 낭만 희극의 완성작으로 불리는 이 유쾌한 이야기에 대해 떠들 여유가 없다. 아쉽지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맬볼리오에는 미치지 못하고, 안토니오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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