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납치사건

처음 <제인 에어 납치사건>이 출간되었을 때의 난 표지와 작가의 약력만으로 내용을 무시한 채 문학사기꾼이 지어낸 시시한 이야기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아니 그날의 기분이 도저히 이런 소설을 즐겁게 읽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 블로그의 초입에 놓여진 그 당시의 글들을 상기시켜주는 것처럼 난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 싶다. 하지만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이상 신호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언급하는 소설의 구조와 배경이 예상외로 참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언급만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파기하기에는 그동안 쌓아온 책에 대한 감식안의 신뢰 상실의 여파가 너무 컸다. 결국 내면의 목소리는 중계점을 찾았다. 실수는 인정하되 실수를 바로 잡는 일은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로 미루자는 얄팍한 협상안이었다. 양심과 감식안 사이에서 협상안은 조용히 통과되었다.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첫 크리스마스에 이책을 읽음으로써 협상안은 조용히 구체화 되었다.

소설은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정확한 시대를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크림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러시아 혁명도 발생하지 않았고, 웰즐리는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영국은 주축국에게 점령당할 뻔 했다. 처칠은 사라졌으며 마찬가지로 대처도 없음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말로 주의자들과 베이컨 주의자들의 대립이라니. 상상력이 낳은 수많은 세계가운데 이보다 더 즐거운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이 소설은 가능성의 실험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시간 여행과 뒤바뀐 세계. 이야기와 현실의 결합. 이보다 매력적인 소재를 상상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명확하다. 기발한 가능성의 실험을 충실하게 뒷받침해 줄 내러티브는 작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소설에는 상상력을 압도하는 지성과 격렬한 감정이 없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우리는 즐거워 하며 유쾌해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다. 이 소설에는 위대한 세계도, 위대한 인물도, 위대한 사랑도 없다. 그저 우리의 문학적 교양을 이용해서 소극을 즐기면 그만이다.

만약 이 소설의 주요 뼈대 가운데 하나인 <제인 에어> 대신에 <폭풍의 언덕>이 그 자리를 대신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제인 에어>는 다분히 잘 된 소설이지만 <폭풍의 언덕>만큼 격렬하고 아름답지는 않다. 이왕 문학적 교양을 통해 장난을 치기로 마음 먹었으면 감정의 격렬함을 살릴 수 있는 주제였어야 한다. 로체스터보다는 히스클리프가 더 멋진 캐릭터가 아닌가? 이왕 상상력을 동원하기로 했으면 히스클리프가 캐시 대신 이사벨라를 택하던 시점의 독백을 창조해 낼 수 있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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