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인에게서 온 편지, 일급 비밀

날카로운 심리분석의 대가로서 전기 소설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츠바이크지만 난 그의 중편 소설들을 조금은 더 좋아한다. 그의 소설들에서는 사랑을 많이 경험해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곁에서 세심하게 관찰해 본 사람 특유의 노련함이 풍겨져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 전자가 확실할 것 같다. 그처럼 재능 많고 장년에 이르러서도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녔던 소설가라면 평범한 관찰자에 머무르기 보다는 수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노련함이 풍겨져 나오는 그의 중편 가운데 숨겨놓은 보석처럼 혼자 즐기는 소설은 두 권인데 <낯선 여인에게서 온 편지>와 <일급 비밀>이라는 제목의 책들이다.

낯선 여인에게서 온 편지
<낯선 여인에게 온 편지>는 번역만해도 다섯 종류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제목도 원제를 직역에 놓은 것부터 <편지>까지 꽤 다양하다. 더욱이 전집으로 묶여 출판된 것부터 하나의 단편으로 간행된 것까지 많은 종류를 자랑한다. 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을 수 있을만큼 얇은 분량이고 까페에 앉아 햇살을 즐기며 읽을 정도로 쉬운 소설인데다가 맛깔스러움까지 구비하고 있다. 아니 이 소설에는 맛깔스러움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사람에 따라 감상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얼굴조차 모르는 낯선 여인으로부터 전달된 편지 속에 담긴 사연은 기구하고도 슬프며 아름답다. 아직까지 나는 사랑의 시작과 끝에 관해서, 첫사랑에 관하여, 아니 짝사랑에 관하여 이토록 애잔한 느낌을 선사하는 소설과 만나보지 못했다.-고백하건데 읽고 울게 된 마지막 소설이었다. 한 십여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처음 읽었을 당시의 충격은 15살 중학생이 봤던 95년도의 해적판 <러브 레터>의 충격을 압도했고,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이런 사랑을 받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넋두리를 늘어 놓았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나 역시 끝내 낯선 여인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가 되었음을 깨닫고 전율했다. 그리고 이십대 후반이 된 지금은 그런 편지를 보낼 용기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사실 <낯선 여인에게 온 편지>는 좀처럼 권하지 않는 책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요즘처럼 사랑에 목말라 하는 주변의 지인들을 볼 때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하나 애써 그럴 여유는 없다고 냉혹하게 구는 나를 발견할 때면 불현듯 꺼내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일급 비밀
<일급 비밀>은 자판기 커피와 앉을 자리만 있으면 25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얇은 두께다. 하지만 이 책을 25분만에 읽는 사람은 소설을 읽는 즐거움과 거리가 먼 사람이 틀림없다. 어느날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접근’과 ‘대상’에 관하여 이보다 더 잘 된 묘사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절거렸는데 이 의견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소설에 묘사된 주인공 에드가의 모친은 하나의 조각품이다. 물론 순수한 묘사로 따지자면야 이보다 나은 캐릭터들이 흘러 넘치겠지만 츠바이크의 문장은 다른 방향으로 핵심을 찌른다. 집중력과 관찰의 승리이며 메리 스튜어트와 마리 앙뜨와네트를 통해 선보인 여성과 사랑에 관한 츠바이크의 소고다.

하지만 이 작품은 본격적인 로망스로 보는 시각보다 성장 소설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 소설의 주인공이 12살 소년인데다가 소년의 모친과 남작사이의 연애는 소년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장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츠바이크의 다른 소설들에 비하면 조금은 조잡하고 헐거운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빠른 전개와 엉성한 사건의 틈바구니에서 독자는 츠바이크가 묘사한 여성들의 특징을 모두 지닌 태초의 이브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 독자는 모든 로망스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숨겨진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소설의 일급 비밀이 무엇이냐는 해석이 논의된 적조차 없을 정도로 츠바이크의 가장 앙상한 가지에 해당되는 책이지만 그럼에도 난 <여자의 일생>보다 이 책이 더 풍부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의견을 굽힐 수 없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